[가족이 변한다, 집이 변한다] [2] 판교동 '층층마루집'
친정 3대 8명이 모여사는 집… 모계중심사회와 닮아있어
중정에 외부마루 엇갈리게 쌓아 서로 소통하면서 사생활 보장
젊은 건축가賞 조진만 설계 "가족이 주인공인 '우리의 집'"
친정이냐 시댁이냐 육아 도우미냐. 워킹맘은 늘 고민한다, 누구에게 육아를 의지해야 할지. 그나마 제일 맘 편한 건 친정 부모다. 맞벌이가 늘면서 자연히 친정 중심으로 육아 축이 재편되는 이유다. 누구는 모계중심사회로의 회귀란다. 지난해 12월 성남시 판교동에 들어선 '층층마루집'(대지면적 231m², 연면적 204m²)은 이런 세태를 잘 보여주는 집이다.
건축주인 이종희(35)·오경미(35)씨는 다섯 살, 세 살 아이 둘을 둔 맞벌이 부부. 시댁 근처 서울 봉천동 20평대 아파트에 살다가 몇 해 전 고민에 빠졌다. 육아 휴직 중인 아내가 내년 3월 복귀하면 아이 맡아줄 사람이 문제였다. 고심 끝에 부부는 경미씨 친정과 합치기로 했다. 아이 봐주기가 여의치 않은 시부모님도 흔쾌히 승낙하셨다. 막상 합가(合家)하려니 만만치 않았다. 친정 부모님에 미혼인 남동생, 여동생까지 8명이 좁은 아파트에서 복닥거리고 살자니 갑갑해졌다. 조용히 살던 부모님과 동생들에게도 짐이 되는 것 같았다. 결국 부부와 친정 부모는 각자 가진 아파트를 처분해 서로 눈치 덜 보고 사는 구조로 단독 주택을 짓자고 의기투합했다. 여동생도 비용을 일부 보탰다. 5개월의 공사 기간 동안 공사비는 인테리어를 포함해 5억원 정도가 들었다.
"이왕이면 복잡한 가족 구성에 꼭 맞으면서도 사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는 집을 짓고 싶어 건축가를 찾았어요." 최근 이 집에서 만난 경미씨가 말했다. 연이 닿은 건축가는 OMA로테르담·베이징 등에서 일하고 2013년 귀국한 젊은 건축가 조진만(40·조진만아키텍츠 대표·사진)씨였다. 막 사무실을 열어 열의에 찬 건축가와 단독 주택의 꿈에 부푼 가족은 수시로 머리를 맞댔다. 건축주와의 대화가 솔직할수록 생활밀착형 설계가 나오는 법. "처음에 동생들 방은 지하에 두려 했어요. 언젠가 시집 장가가면 쓸모없는 공간이 된다고 생각하신 거죠. 그런데 동생분들이 발끈하시더라고요. 언니, 누나 집만이 아니라 '우리의 집'이기도 하다는 거였어요(웃음)." 결국 동생 방은 햇살 잘 드는 2층 남향에 나란히 놓였다. 건축가가 들려준 일화다.
6명의 건축주가 요구하는 사항은 저마다 달랐다. 화초 기를 정원(친정아버지), 커다란 주방(친정어머니), 가족실(남편), 개인 공간(두 동생), 넉넉한 수납장(아내)…. 필요한 공간만 17개였다. 난제는 '마루'로 해결됐다. 층마다 중정 형태로 외부에 '마루'를 엇갈리게 해두고 방들이 이 마루를 둘러싼 형태로 설계했다. 층높이도 다양하게 해 3층 같은 2층 집을 만든 뒤 1층엔 부모님 방, 2층은 동생 방, 3층 옥탑 층은 부부와 아이 방을 배치했다.
집 안은 작은 산림욕장 같다. 벽면과 마루가 목재로 마감된 데다 오솔길처럼 방과 거실, 주방이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중정을 향해 엇갈리게 난 작은 창(窓)들은 소통의 창이다. 고개 빼꼼 내밀면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이, 할머니가 음식 하시는 모습이 보인다. 이 창들 덕에 피하고 싶을 땐 피하고, 보고 싶을 땐 볼 수 있는 시선 처리가 이뤄졌다.
"자식들 키울 땐 느끼지 못한 즐거움을 손주들 키우며 느껴요. 모든 게 처가살이 안 좋게 볼 수도 있는데 이해해 주시는 사돈 덕이죠." 2년 전 교직에서 퇴임한 친정아버지 오병갑(63)씨는 사돈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을 잊지 않았다. 이해와 배려가 만든 이 집 덕택에 건축가 조씨는 올해 문화체육관광부가 주는 '젊은 건축가'상과 '김수근 건축상 프리뷰상'을 탔다. "설계는 제가 했지만 집을 집답게 만드는 주인공은 사람 냄새 솔솔 나는 이 집 가족들입니다." 집안 곳곳 널린 빨래를 보며 건축가가 웃었다. 빨래 건조대에 나란히 걸린 손녀 원피스와 할아버지 셔츠가 중정으로 쏟아지는 햇볕을 정겹게 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