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 늘면 집값 올라' 공식 깨져]
작년 거래량 7년만에 최대… 가격 상승률은 2%에 그쳐
집값 더 오를 거라는 기대 사라져… 투기보다는 실거주 목적 거래
전문가들 "시장 정상화 과정"
1999년 입주한 서울 노원구 공릉동의 '동신아파트'. 올 1월 한 달 사이 이 단지에서는 작년 같은 달의 두 배인 6채의 아파트가 팔렸다. 하지만 1년 동안 매매 가격은 큰 변동이 없다. 이 아파트 전용 59㎡는 작년 1월 최고 2억4800만원에 매매가 성사됐으며 올해 시세도 비슷한 수준이다. 집주인들은 2억6000만원 이상을 받고 싶어하지만 매수 대기자들은 2억4000만원대 아파트만 찾고 있는 탓이다. 공릉동 '동신공인'의 이배식 사장은 "전세금에 4000만원만 보태면 같은 면적의 집을 살 수 있을 정도로 전세금이 오르자 매수 문의가 늘었다"며 "하지만 구매자들이 가격에 민감해 비싸다고 생각하면 이내 포기한다"고 말했다.
주택 매매(賣買) 시장에서 무주택자와 신혼부부 같은 실수요자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시세 차익을 노린 투자보다는 실거주 목적으로 집을 사는 소비자들이 주택 시장을 견인하는 것이다. 3년간 매매가격은 사실상 제자리걸음인 반면, 전세금은 고공 행진을 하면서 생긴 현상이다. 이로 인해 매매 거래는 늘어나도 매매가격은 꿈쩍도 않는 주택 시장의 '디커플링'(de-coupling·탈동조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 거래량은 크게 늘고 있지만 가격 변동은 큰 변화가 없거나 소폭 상승에 그치는 것이다.
◇거래량 늘면 가격 오른다는 公式 깨져
주택시장에서는 매매 거래량과 매매가격 상승률이 정비례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2000년대 들어서도 주택 경기가 한창 좋았던 2006년 거래량(108만건)과 가격 상승률(11.6%)이 동반 급등한 사례가 있다. 허윤경 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당시엔 집주인이 가격을 높여 부르더라도 구매자가 그대로 받아들였다"면서 "이 같은 '추격 매수'가 나타난 이유는 집값이 앞으로 더욱 오를 것이란 기대감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매매 가격이 거의 변동 없거나 소폭 상승하는 상태에서 매매 거래량이 급등하는 현상이 보인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작년 연간 주택 거래량은 100만건으로 2006년 이후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하지만 같은 기간 주택 가격 상승률은 2%대에 그쳤다. 올 1월도 거래량은 7만9300건으로 작년 1월보다 34% 정도 급증했지만, 가격 상승률(0.13%)은 작년(0.11%)과 거의 같다.
이는 최근 매매 시장을 주도하는 주인공이 실수요자, 즉 전세난에 지친 세입자이기 때문에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작년 말 기준 전국 아파트 매매가격 대비 전세금 비율(전세가율)이 사상 처음으로 70%를 돌파할 만큼 매매가격과 전세금 간 격차가 좁혀지자 매수하려는 세입자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실수요자 위주 거래 증가…"싸야 산다"
실수요자가 매매 거래를 주도하는 패턴은 서울 주요 자치구별 주택 거래량 추이에서도 확연하다. 작년 1월과 비교한 올 1월 주택 거래 증가율이 높은 주요 지역은 노원구(31%)와 성북구(29%)를 비롯해 실수요자들의 매수가 많은 강북지역에 집중돼 있다. 반면 전통적으로 투자 목적의 매매 거래가 많은 강남(-11%)·서초(-4%)구의 거래량은 같은 기간 오히려 줄었다.
최근 도입된 수익 공유형 주택담보대출과 무주택자 금리 우대 등 최근 정부정책도 실수요자들의 주택 구매를 부추기고 있다. 이 때문에 새 아파트를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청약 시장이나 수도권 미분양 아파트에도 소비자가 몰린다. 서울 전세금으로 새집을 장만할 수 있는 경기 김포시의 미(未)분양 아파트가 작년 5월 4200가구에서 11월 677가구로 급감한 것도 대표적인 사례다.
◇'매매시장 정상화' 관측도
전문가들은 이런 상황이 장기 침체기에 빠져 있던 주택 매매시장이 정상화되고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고 해석한다. 박합수 국민은행 부동산팀장은 "실수요자들이 매수에 나서는 것은 최소한 집값이 더는 내려가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이 힘을 얻고 있다는 의미"라며 "최근의 구매 심리 회복이 완만한 집값 상승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경제성장과 인구 증가 속도가 줄어든 만큼 앞으로 예전과 같은 가파른 집값 상승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함영진 '부동산114' 센터장은 "집에 대한 투자로 큰 차익을 얻는 것은 정책 민감성이 큰 서울 재건축 아파트와 인기 지역의 분양 아파트 등 일부 상품에 제한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