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시간요? 없어요. 일 끝나는 때가 퇴근 시간이죠.”
지난 6월 10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로 삼우종합건축사사무소. 10여명의 사람들이 심각하게 머리를 맞대고 있다. 때 이른 불볕더위가 달궈놓은 도로만큼이나 사무실의 열기도 뜨겁다. 시계는 오후 6시를 넘어서고 있었지만 퇴근할 기미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이들은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아파트 재건축 설계팀이다. 이들 앞에는 아파트 모형 단지가 여러 개 늘어서 있다. 단지를 축소한 스티로폼 패널 위에 1만1000가구가 넘게 들어설 고층 아파트 모형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다.
삼우종합건축사사무소 주거설계팀이 둔촌주공 설계 입찰 공고에 선정돼 작업을 시작한 것은 2002년이다. 아파트 단지를 수없이 짓고 또 짓고, 10년 동안 지어올린 단지 모형이 수백 개가 넘을 것이다. 서울시 건축심의를 통과하려면 2~3번 재심의 판정을 받는 것은 기본이다. 2006년 건축심의를 통과하고 결정고시까지 일단락이 됐지만 조합에서 용적률 상향조정을 추진하는 바람에 수년 고생이 원점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건축심의에 제출한 서류 제본비만 해도 집 한 채 샀을 겁니다.” 팀을 이끌고 있는 김지선 부소장이 웃으면서 말했다. 15~20명이 둔촌 프로젝트에만 매달려 작업한 설계안이 최근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5월 초 일부 종상향(용적률 상향)이 결정됐기 때문이다. 아파트 설계팀은 이중으로 ‘을’의 위치에 있다. 클라이언트인 조합원과 서울시 사이에서 설계팀이 뜻대로 할 수 있는 여지는 많지 않다. 조합원 요구와 서울시 정책 사이에서 힘든 줄타기를 해야 하는 설계팀에 최근 구원투수가 나타났다. 서울시가 투입한 공공건축가이다. 서울시와 조합원, 설계팀의 중간에서 의견을 조율하고 설계를 자문하는 역할이다.
공공건축가 제도는 서울시의 공공건축물과 정비 사업의 계획 및 설계 단계에서 건축전문가가 투입돼 자문 및 조정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서울시는 지난해 2월 77인의 민간 건축전문가(신진 건축가 35명, 총괄계획 건축가 17명, 우수 디자이너 25명)를 선정해 서울시 공공건축가로 임명했다. 공공건축가들은 현업에 있거나 대학교수가 중심이다. 활동에 대한 대가는 현재 예산으로 책정된 것은 없다. 일종의 재능기부 형태이다.
공공건축가의 활동이 관심을 끈 것은 올 초 대규모 재건축 단지인 서울 송파구 잠실 5단지와 가락시영아파트에 투입되면서부터이다. 서울시가 공공건축물이 아닌 아파트에도 공공건축가 제도를 적용한 것. 사업자 중심의 아파트 건축을 주민·전문가·행정의 협업 체제로 전환, 아파트의 공공성을 높이고 건축문화를 바꿔 보겠다는 의지에 따른 것이다. 높은 담벼락 안에 쌓아올린 ‘그들만의 城’이 아닌 도시 환경과 어우러지고 주민과 공유하는 열린 공간으로 아파트 건축 개념을 바꾸는 과정에 공공건축가가 들어간 것이다.
첫 시범 케이스는 가락시영 재건축. 지난 2월부터 정진국 한양대 교수를 총괄로 이공희 국민대 교수, 서현 한양대 교수 등 3명의 공공건축가가 투입됐다. 10년 넘게 조합원 이해관계가 얽힌 상태에서 지지부진하던 사업은 공공건축가와 협업한 주택재건축정비사업 계획안이 지난 5월 7일 서울시 건축위원회의 심의를 통과하면서 숨통이 트였다. 2000년 9월 안전진단 통과를 기점으로 재건축 논의가 시작된 가락시영 재건축은 연내 조합원을 대상으로 한 관리처분인가가 마무리되고 예상대로 사업이 진행된다면 내년 상반기 착공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가락시영은 주민 이주가 거의 진행됐기 때문에 시간이 늦춰질수록 건축비용이 늘어나는 상황이라 건축심의 통과가 시급했다. 조합원 간 내분, 서울시 정책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황에서 공공건축가가 매듭을 푸는 역할을 성공적으로 해낸 것이다.
가락시영의 원 설계자는 종합건축사사무소 건원(대표 이상인)이다. 심의를 통과한 설계안은 기존설계안과 확 달라졌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중앙공원을 중심으로 건물들이 둘러싼 채 도시와 단절돼 있던 것을 폭 50? 길이 1㎞에 이르는 공원이 단지 좌우를 관통하게 만들었다. 공원의 한쪽은 송파역과, 반대쪽은 탄천과 일직선으로 통하면서 인근 주민도 공원을 이용할 수 있는 열린 단지가 됐다.
스카이라인도 바꿨다. 단지 중앙에 고층을 배치하고 주변부로 갈수록 점차 낮아지도록 했다. 단지 주변을 둘러싼 고층 건물들의 위압감을 최소화하고 단지 안의 공간 구성을 바깥쪽에서도 알 수 있다. 또 재건축 단지의 경우 대부분 분양과 임대 가구를 분리해 ‘한 아파트 두 단지’ 형태이던 것을 고루 섞어 어느 동이 임대이고 어느 동이 분양 동인지 알 수 없게 만들었다.
김지선 소장은 “폐쇄적인 공간에서 열린 공간으로 공동주거의 방향이 바뀌고 있다고 생각한다. 공간을 공평하게 쓰는 시대가 온 것”이라고 말하고 “공공건축가가 투입되면서 가장 좋은 것은 예측가능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작업 도중에 서울시 심의위원들이 바뀌면 심의 기준을 예상할 수 없다 보니 어떤 기준에 맞춰야 할지 혼란스러운 때가 많았다. 시를 대변해서 기준을 잡아주고 조합원과의 충돌도 중재하는 역할을 해주니 불필요한 시행착오를 줄여준다”고 밝혔다.
서울시는 ‘공공건축가 투입 1호’ 가락시영아파트의 성공을 계기로 강동구의 최대 규모 재건축단지인 둔촌주공에도 공공건축가를 바로 투입하고, 2000가구 이상 재건축 단지에 공공건축가 제도를 적용한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서울시 주택정책실 내에는 지난 2월부터 공공건축가를 담당하는 팀도 신설됐다.
공공건축가 운영을 맡은 최원석 건축정책추진단 정책운영팀장은 “공공건축가 제도는 법으로 정해진 의무사항은 아니다. 원래는 공공건축물 자문역할로 생각했는데 대규모 재건축도 주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공공성을 높이자는 취지로 공공건축가를 투입했다. 권유사항이지만 아파트 주민만이 아닌 주민과 소통하는 공간으로 개선된다면 최대한 절차들을 축소하고 빠른 진행을 도와주겠다는 것이 서울시의 입장이다. 건축심의 과정에서 보류, 재심의 등 시행착오가 많았기 때문에 불필요한 사업기간을 단축해보자는 뜻도 있다”고 말했다.
가락시영아파트 개선안이 예상외로 빠르게 건축심의에 통과된 후 공공건축가에 대한 재건축 조합원들의 시선도 달라졌다. 특히 건축심의를 앞둔 둔촌주공의 경우 기간 단축에 대한 기대감이 크다.
둔촌주공 조합원이기도 한 둔촌동 하나부동산 서형중 사장은 “서울시에서 소셜믹스 개념을 적용하고 아파트의 공공성을 높이기 위해 지침을 준 것이기 때문에 그 흐름을 비켜갈 수는 없다고 본다. 조합원들의 관심은 아파트의 가치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느냐는 것인데 개인적으로는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재건축에서 잡음은 변수가 아니라 상수다. 반대는 있게 마련이지만 재건축은 시간싸움이다. 공공건축가가 들어와서 기간이 단축된다면 고무적인 일이다”라고 말했다.
건축계에서도 아파트 단지가 도시를 점령한 기형적인 건축구조에 대해 염려하는 사람들은 공공건축가의 역할에 대해 기대를 걸고 있다.
이중원 성균관대 건축과 교수는 “우리나라 아파트는 게이트 커뮤니티이다. 길과 도시로 연결이 돼야 하는데 도시 속 섬처럼 돼 있다. 사업가들은 비즈니스 차원에서 접근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공공건축가의 역할이 필요하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들어온 유능한 인재들이 많은데 이들을 아예 공공건축가로 양성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서울 송파구 잠실5단지 공공건축가로 참여한 신승수 대표(디자인 그룹 오즈)는 “공공건축의 경우 기획이 필요하다. 계획 없이 발주가 되고 일이 진행되다 보니 시행착오도 많다. 대단지 아파트뿐만 아니라 중소규모 공공건축물은 기획 단계부터 체계적 관리가 필요하다. 런던도 그렇고 외국은 시 소속의 건축가가 있는 곳이 많다. 네덜란드도 국가 건축가가 있어서 공공건축을 관리하고 있다”고 말하고 “서울시의 경우 예산 없이 건축가의 재능기부에 기대고 있는데 체계적 시스템을 갖추려면 보완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신 소장의 말처럼 공공건축가에 대한 보상은 대책이 필요하다. 현업이 있는 상황에서 대가도 없이 두 가지 일을 병행하기는 쉽지 않다. 최원석 팀장은 “현업 건축가는 일을 맡기려 해도 고사하는 경우가 많다. 실무 경험이 있는 교수들에게 의존하고 있는데 인력 풀이 많지 않다. 노력에 대한 보상도 고민이다. 돈이 주가 되면 공공성이라는 제도의 본질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에 자문수당 등 적정한 수준의 대가를 생각 중이다”라고 말했다.
‘아파트 단지의 공공성’에 대해서 논란의 여지는 많다. ‘아파트 공간을 지역 주민과 공유하는 것은 재산권 침해다’ ‘공공건축가 제도는 주민 자율성을 거스르는 것 아니냐’ 등 반대도 많지만 획일적인 아파트 단지 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높다. 가락시영으로 일단 합격점을 받은 공공건축가 제도가 아파트 건축의 방향을 바꿀 수 있을 것인지, 어느 정도의 역할을 할 것인지, 도시환경 개선을 내세운 서울시 건축의 새로운 실험은 이미 시작됐다.
- 더 많은 기사는 2013년 6월 17일 발매된 주간조선 2261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