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약률·시세 높아… 인기 끌던 타워형은 '찬밥' 신세]
성냥갑 아파트들 1순위 마감… 타워형은 일부 미달되기도
서초구 방배동 59㎡ 시세… '성냥갑'은 7억1000만원, 타워형은 6억3500만원
한국 아파트 문화를 연구하는 프랑스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는 저서 '아파트 공화국'에서 동료 도시계획가에게 한강변 아파트 지도를 보여줬던 경험을 적었다. 이 도시계획가가 "한강변의 군사 기지 규모는 정말 대단하군"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들에겐 성냥갑처럼 빽빽이 들어선 이 아파트들이 마치 병영(兵營)처럼 보였던 셈이다.
한때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판상형(板狀形)' 아파트, 이른바 '성냥갑 아파트'가 다시 인기를 끌고 있다. 천편일률적인 디자인 때문에 도시 경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퇴출 일보 직전까지 갔으나 최근 들어 위상이 달라지고 있다.
◇'성냥갑 아파트' 청약률·시세 높아
대우건설이 지난해 8월 위례신도시에서 분양했던 송파 푸르지오 아파트는 14개 평면으로 이뤄졌다. 판상형이 9개, 타워형이 5개였다. 청약 결과는 의외였다. 판상형은 분양을 시작하자마자 1순위에서 마감했지만, 타워형은 1개를 제외하고는 3순위까지 가서야 가까스로 청약을 끝낼 수 있었다.
지난해 강원도 원주시에서 분양됐던 원주 한라 비발디 2차 아파트는 같은 전용면적 84㎡라도 '판상형이냐, 타워형이냐'에 따라 운명이 갈렸다. 판상형인 A타입 130가구는 청약을 다 마쳤지만, 타워형인 B·C타입은 미달됐기 때문이다. 실내 구조나 평면 구성은 비슷했는데도 결과는 판이했던 것이다.
판상형이 다시 뜨면서 타워형은 찬밥 신세로 전락했다. '타워형'은 빌딩처럼 생긴 아파트로 모든 가구가 한 방향을 바라보는 판상형과 달리 다양한 평면 구성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서울 도곡동 초고층(42~66층) 주상복합 아파트 타워팰리스가 대표적이다. 타워형은 삭막하다는 비난에 시달린 판상형을 대체하는 디자인으로 한동안 유행을 주도했으나 빠르게 밀려나는 중이다.
시세에서도 판상형은 타워형을 압도하고 있다. 서울 마포 상암동 월드컵파크 12단지 전용면적 84㎡A형(판상형) 아파트는 5억1000만원 선에 거래가 이뤄지고 있다. 이에 비해 84㎡B형(타워형)은 4억9500만원. 1500만원이 싸다. 서초구 방배동 서리풀e편한세상 아파트 59㎡ 시세에서도 판상형(7억1000만원)이 타워형(6억3500만원)을 눌렀다.
삼성물산이 이번 주 위례신도시 A2-5블록에서 분양하는 래미안 위례신도시는 모든 평면이 100% 판상형으로 이뤄졌다. 한양이 세종시 1-2생활권 M4블록에서 분양하는 세종 한양수자인 에듀센텀이나 중흥건설이 경북 구미시 옥계동 919번지 일대에 짓는 구미 옥계 중흥S클래스 아파트도 단지 전체가 판상형 디자인으로 설계됐다.
2000년대 후반 서울시와 국토해양부(현 국토교통부)가 '성냥갑 아파트'를 추방하겠다는 의지로 디자인 가이드라인까지 만들었던 점을 감안하면 시절이 바뀐 것이다.
◇실속을 중시하는 풍토가 작용
타워형과 판상형은 저마다 장점이 있다. 타워형은 고층이라 조망권이 좋고, 동(桐)과 동 사이가 멀어 녹지 공간이 풍부하다. 모든 건물이 '一'자형인 판상형과 달리 '+' 'Y' 'ㅁ'자형 등 다양한 공간 배치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외양이 좋다.
판상형은 디자인은 밋밋하지만 구조상 가구 앞뒤가 뚫려 있어 통풍·환기가 잘 되고 대부분 남향이라 채광·냉난방 효과도 크다. 앞뒤로 발코니를 확장해 집을 넓게 쓸 수 있는 것도 이점. 삼성물산 김상국 마케팅 부장은 "분양 시장이 실속형 실수요자 중심으로 움직이면서 세련된 외관을 지닌 타워형 아파트보다 판상형 아파트를 선호하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결국 에너지 효율과 공간 활용도가 높은 판상형이 실속을 추구하는 분위기를 타고 인기를 끄는 셈이다.
포스코건설이 인천 송도국제도시에 짓는 송도 더샵 그린워크 1·2차 아파트는 유행을 따라 타워형으로 설계하려다 수요자들이 판상형을 요구, 판상형 비율을 당초 각각 19%, 9%에서 68%, 63%로 늘렸다.
현대건설도 서울 은평구 응암동 일대를 재개발해 분양하는 3221가구 규모 백련산 힐스테이트에 임대 아파트 552가구를 제외한 2669가구 중 판상형을 1974가구로 놓았다. 현대건설은 "설계 당시 조합원들이 판상형을 선호해 더 많이 배치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