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이 250만원인데 월세·관리비가 70만원
"이대론 내 집 마련은커녕 평생 전세도 못 구할 것"
생활비·학원비 줄여 월세 대는 가정 늘어
11일 경기도 광명시 광명5동 한진아파트 근처 한 부동산중개소. 신모(32·여)씨가 중개업소 사장에게 "제발 좀 이 가격에 맞는 전셋집을 구해달라"고 통사정을 하고 있었다.
신씨는 2년 전 결혼해 한진아파트에 1억3000만원 보증금 전세에 신혼집을 차렸다. 그런데 최근 집주인이 "보증금을 4000만원 더 올려주든지, 아니면 2000만원만 올리고 나머지는 월 20만원씩 월세를 내든지 하라"고 요구했다.
신씨 부부의 월 순수입은 180만원. 신씨는 "결혼할 때 빌린 3000만원 대출금을 아직 갚아나가야 하는데 남편 수입으로 월세까지 내면 도저히 생활이 불가능하다"며 "생활비를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 며칠 전부터 남편 도시락을 싸주고 있다"고 했다.
전세금이 급등하면서 일부 전세보증금을 월세로 요구하는 집주인이 늘면서 세입자들의 고통이 가중되고 있다. 신씨처럼 '월세 피난민'이 돼 중개업소를 떠도는 사람도 적지 않다.
◆월세의 공포, 서민을 짓누른다
이날 오후 경기도 광명시 광명동의 연립주택 밀집지역. 얼마 전 관절염 수술을 받았다는 하모(64)씨는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중개업소를 돌고 있었다. 그는 6500만원짜리 다세대 주택 전셋집에 살고 있었지만, 얼마 전 집주인으로부터 '보증금 1500만원, 월세 40만원'으로 바꾸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하씨는 "딸한테 생활비 80만원을 받아 생활비와 병원비를 감당해야 하는데 월세까지 내면 밥을 굶어야 할 판"이라고 말했다.
임대주택 시장이 월세 위주로 바뀌면 전세의 주 수요자인 서민층과 신혼부부의 주거비용은 급증한다. 예컨대 세입자가 보증금 2억원에 전세를 산다면, 2억원을 저축했을 때 받을 수 있는 매월 이자 66만원(예금금리 4% 기준)을 기회비용으로 내는 셈이다. 하지만 이를 모두 월세로 낸다면 116만원(월세는 일반적으로 7% 이자율 적용)을 내야 한다. 결국 세입자는 월세로 살면 전세보다 50만원 더 손해를 보는 셈이다.
이 때문에 월셋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생활은 빠듯해지기 마련이다. 회사원 손모(28)씨는 지난달 초 결혼해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 72㎡(약 24평)짜리 아파트를 보증금 1억원에 매달 50만원씩 내는 월세로 구했다. '외벌이'인 그의 월급은 250만원가량. 관리비(20만원)까지 합치면 주거비만 매달 70만원가량 든다. 손씨는 "월셋집에 살다 보면 내집마련은 고사하고 평생 전셋집도 못 구할 것 같다"고 말했다.
◆집값 안 오르면 전세 사라질 것
전세 제도는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우리나라의 독특한 제도다. 지난 40~50년간 우리나라에선 집값이 물가보다 훨씬 많이 올랐다. 집주인은 집값의 반값만 받고 전세를 주더라도 나중에 집값이 오르면 이익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집값이 오르지 않으면 집주인 입장에서는 시중 금리의 1.5배가량 더 받을 수 있는 월세를 받는 게 훨씬 유리하다.
실제로 강남권인 서울 송파구 트리지움 아파트 인근에 있는 A공인중개업소의 경우 매물로 나온 전세 임대 아파트 중 전셋집이 3건, 월셋집이 7건(일부는 전세, 일부는 월세로 내는 보증부 월세 포함)에 달했다. 이 중개업소 관계자는 "요즘 강남 지역 대단지 아파트의 임대 매물은 70~80%가 월세"라고 말했다.
전국적으로도 전세의 비중은 줄어들고 월세 주택의 비중이 늘고 있다. 국민은행의 조사에 따르면 2008년 1월에는 임대 주택의 40.6%가 월세 주택이었지만 지난달(1월)에는 43%로 늘어났다. 건국대 이현석 교수는 "집값이 과거처럼 오르지 않는 한 전세 제도는 서서히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세입자는 물론 정부에서도 '월세 시대'를 제대로 준비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남희용 주택산업연구원 원장은 "월세 시장으로 임대주택 시장이 재편되면 전세의 주요 수요층인 서민층은 물론 중산층의 주거비가 급격하게 상승하게 된다"며 "정부 차원에서 월세 위주의 임대 주택 시장을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