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전세대책의 딜레마]
집값 잡으니 전세가… "집값 더 떨어질텐데"
매매수요가 전세수요로… 결국 서민층만 고통
그렇다고 집값 올릴순 없고…
"집값·전셋값 다 잡는건 현실적으로 불가능, 매매·전세 균형 잡아야"
"돈이 있어도 집을 안 사고 전셋집에 살겠다는 사람이 많아서 전세금이 오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무슨 전세 대책을 세우겠는가. 억지로 집을 사라고 할 수도 없고…."
정부가 '서민 물가 안정을 위한 종합대책'의 하나로 전·월세 시장 안정화 방안을 내놓은 13일, 한 민간 경제연구소 연구원은 이렇게 말했다.
정부는 이날 모두 16개의 대책을 발표했다. 서민들이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전·월세로 집을 구할 수 있도록 소형 분양·임대주택 9만7000가구를 최대한 빨리 공급하고, 도시형 생활주택과 다세대·다가구 주택 공급을 활성화하기로 결정했다는 게 골자이다. 또 '6개월 이상 무주택자'가 아니어도 전세자금을 대출받을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주택 업계와 전문가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전세금은 2009년 초부터 본격 오르기 시작해 최근 2년 동안 전국·수도권의 전세금은 14%(국민은행 조사) 정도 상승했다. 서울 강남권은 24% 정도 올랐다. 반면 전국 집값은 4.9%, 서울은 1.1% 상승에 그쳤다. 전문가들은 현재 벌어지는 전세난은 역설적으로 정부가 '집값 잡기'에 성공하면서 나타난 부작용 중 하나라고 보고 있다.
우선 집을 살 여력이 충분한 중산층도 "집값이 오르지 않는데 집을 살 이유가 없다"며 전세 수요자로 눌러앉고 있다. 그 결과 서울 강남 지역에선 전세금이 4억~5억원씩 하는 '초고가 전셋집'이 속출하고 있다. 서울 서초구의 '래미안퍼스티지'의 전용 59㎡(약 17.8평) 아파트의 전세금은 무려 6억원.
이 아파트에 사는 박모(42)씨는 부부 합산 연간 소득이 1억3000만원가량 되지만 집을 살 계획은 없다. 박씨는 "전세 살면서 남는 돈은 펀드에 넣거나 저축하는 게 집 사는 것보다 훨씬 속 편하고 안전한 투자 같다"고 말했다.
신한은행이 지난달 2700명의 시민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집값이 물가 상승률(예상치 3.5%)보다 더 오를 것이라고 대답한 이는 16.5%에 불과했다. 나머지(83.5%)는 집값이 하락하거나, 현 상태를 유지할 것이라고 응답했다. 현재 전국적으로 전세금은 집값의 57% 수준이다. 전세금이 아무리 올라도 집값보다 훨씬 싸기 때문에 집값이 오르지 않는 한 무주택자가 집을 살 이유가 없는 셈이다.
정부가 작년부터 서울 도심과 가까운 곳에 시세보다 저렴한 가격에 보금자리주택을 대거 공급한 것도 전세 시장에는 악재(惡材)다. 전셋집에 살면서 '무주택요건'을 채우면 언젠가는 싼 집을 구할 수 있는데 무리하게 대출받아 집을 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싼 전셋집이 필요한 서민층은 전세 수요 증가로 피해를 보고 있다. 이모(36·자영업)씨는 지난달 경기도 용인 죽전동에서 1억3000만원짜리 전셋집에 살다가 용인 동백지구의 상가 주택에 월셋집으로 집을 옮겼다. 이씨는 "용인 인구가 갑자기 늘어난 것도 아니고 새 아파트도 많이 지었는데 이유 없이 전세금이 뛰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싼 전세를 찾아 서울에서 경기도로 수요자들이 옮겨가면서 경기도 전세 시장으로까지 불똥이 튄 셈이다.
전문가들은 집값과 전세금을 동시에 안정시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남희용 주택산업연구원장은 "집값이 과도하지 않은 수준에서 소폭 오르는 것은 정부도 감수할 수밖에 없다"며 "여유 있는 계층은 집을 살 수 있도록 세금 혜택을 주는 식의 방법으로 매매와 전세 시장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