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형섭소장 ##
공무원들의 대우와 신분을 안정시켜 국가주도의 근대화를 맡긴 박정희는
월남파병에 대한 선물로 존슨 대통령이 설립을 도와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의 발족에 강력한 후견인 역할을 했다. 이
연구소는 한미양국이 1000만 달러씩 2000만 달러를 출연하여 만든 것이었다.
KIST가 경제발전을 뒷받침할 과학기술의 사령탑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1966년 2월3일 초대 소장으로 임명된 최형섭 박사가 처음부터 "어떻게 하면
산업체와 연계를 갖도록 할 것인가"하고 고민한 덕분이다.
사진설명 :
한-미 양국이 1000만 달러씩 출연 1966년 서울 홍릉에 설립한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전경.
최소장은 후진국의 연구소들이 거의 실패하는 이유는 연구소에서 먼저
연구를 한 다음에 사용자를 찾아나선 때문이라고 보았다. 기업체로서는
아무도 쓰지 않는 기술을 이용했다가 자기만 손해보지 않을까 겁을 내니
그런 기술을 사용할 리 없었다. 연구단계에서부터 기업이 돈을 댄다면 다소
위험부담이 있더라도 개발된 기술을 사용하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산업체와 연구소가 처음부터 계약연구를 해야겠다고 판단했다.
두번째 고민은 '유능한 사람을 모으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였다.
대학교의 교수들을 빼오면 교육에 지장을 줄 것이다. 최소장은 해외에 있는
한국인 과학자들을 유치하기로 했다. 문제는 조건이었다. 최소장은
박대통령의 엄호 아래 해외 과학자들이 안정된 환경에서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정착시켰다. 집을 마련해주고 당시 국내에는 없던
의료보험을 미국 회사와 계약하여 들게 해주었다. 자녀들 교육대책도
세워주고 봉급은 중류 정도를 보장해주기로 했다. 주로 미국에서 모셔온
과학자들이 많았는데 미국에서 받고 있던 봉급의 약 4분의 1을 주기로
했다. 연구자는 돈이 너무 많으면 공부를 안한다는 것이 최소장의
지론이기도 했다.
그래도 KIST 연구원들이 받는 봉급은 국립대학 교수의 세 배나 되었다.
서울공대 교수들이 반발했다. 최소장은 "우리 봉급을 깎아내리려고 하지
말고 당신네들 봉급을 우리 수준으로 올려달라고 문교부에 건의하는 게
상식이 아니오"라고 했다. 박대통령도 KIST 연구원들 봉급에 대한 진정과
불평을 듣고 있었다. 그는 최형섭을 불렀다. 봉급표를 갖고 들어오라고
했다. 박대통령은 표를 훑어보더니 "과연 나보다도 돈을 더 많이 받는
사람들이 수두룩하군"라고 했다.
"만일 각하께서 부당하다고 생각하시면 제 봉급만 깎으십시오. 다른
사람은 안됩니다."
박정희는 한참 봉급표를 들여다 보다가 "여기 있는 대로 하시오"라고
말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신이 강한 최형섭은 KIST 육성법안을 만들
때도 '연구소는 회계감사도 받지 않고 사업계획 승인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취지의 조문을 넣었다. 연구하는 데 공무원들이 관료적으로
이것저것 간섭해선 일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정부쪽에서 반대가
심했다. 정부 돈이 들어가는데 어떻게 감사를 안받느냐는 논리는 오히려
타당성이 있는 것 같았다.
이 경우에도 박대통령은 과학자편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막상 국회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당초 법안이 수정되어 연구계획의 승인과 회계감사를
받도록 되었다. 최소장은 박대통령에게 직소하여 1967년 3월 임시국회에
법률개정안을 냈다. 국회의원들도 많은 문제제기를 했다. 나중에 최소장은
"나를 믿고 법안을 통과시켜 주시오"라고 호소했고 국회의원들도 "우리가
과학기술을 모르니 일단 소장을 믿고 맡겨보자"고 했다. 연구소는
공인회계사를 고용하여 회계감사를 시킨 뒤 보고서를 정부에 보내는
것으로 낙착되었다. 최소장은 "일반 행정에서 쓰는 잣대로 연구업무를
재려 하면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감사원이 연구소를 감사하게 되면
연구원들은 잡무에 시달려 본업을 소홀히 하게 된다"고 했다.
"그렇다고 돈을 흥청망청 쓰자는 것이 아니다.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질서를 찾자는 것이다."
박대통령은 서울 홍릉(원래 명성황후의 무덤이었으나 고종이 죽은 후
남양주군 금곡으로 이장되었다)에 있던 임업시험장을 연구소 부지로
검토하도록 최형섭에게 지시했다. 최소장이 농림부와 협의를 해보니 말이
먹혀들지 않았다. 대전, 천안 등지까지 조사하여 30여 군데의 장소를
물색했다. 최종적으로 서울 근교 동구릉을 지목하여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박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서울시장과 농림부 장관을 불러 홍릉으로 갔다.
현장에서 박대통령은 "임업시험장도 중요하지만 한국과학기술연구소는 더
중요하다. 38만 평을 전부 연구소에 주라"고 지시했다. 최형섭 소장은
농림부장관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서 그 가운데 15만 평을 넘겨받아
1966년 10월에 기공식을 올렸다.
박대통령은 최소장을 임명할 때 두 가지 부탁 겸 약속을 했다.
인사청탁을 받지 말 것, 예산을 얻는다고 경제기획원을 들락거리지 말 것.
1966년 가을 연구소는 1967년도 예산으로 10억 원을 신청했다. 김학렬
경제기획원 차관이 양해를 구해왔다. 2억원만 깎자는 것이었다. 국회로
예산안을 넘기기 전에 대통령이 주재하는 회의가 열렸다. 마무리 단계가
들어갔을 때 느닷없이 박대통령이 말했다.
"김학렬 차관, KIST 예산이 얼마라고 했지?"
"8억원입니다."
"원래 신청한 액수는 얼마인데?"
"10억원이지만 소장과 의논해서 8억원으로 했습니다."
"다시 10억원으로 해!"
박대통령은 KIST 설립 후 3년 동안 한달에 한 두 번씩은 꼭 연구소를
방문해 연구원들을 격려했다. 최형섭은 "국가원수의 그런 방문에는 돈도
드는 것이 아니지만 연구소의 위상이 올라가 지원하는 정부부서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지게 만들었다"고 했다.
(*조갑제 출판국부국장*)
(*이동욱 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