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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생애] 제7부 가난한 군인의 길 ① - 포병단장 <192>

뉴스
입력 1998.05.26 19:18





## 휴전직전 발령… '조직적 사고' 단련 ##.

〈휴전조인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 유엔 전폭기가 바로 근처 공산군
진지에 쏟아붓고 있는 폭탄의 작렬음이 긴장된 식장의 공기를 흔들었다.
원수끼리의 증오에 찬 정략결혼식은 서로 동석하고 있는 것조차 불쾌하
듯이, 또 빨리 이 억지로 강요된 의무를 끝마치고 싶다는 듯이 산문적으
로 진행된다. (중략). 거기에는 의식에 따르는 어떤 극적 요소도, 강화
에서 예기할 수 있는 화해의 정신도 없다 .
사진설명 :
휴전협정에 서명하는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전이지
평화가 아니란 설명을 잘 알 수가 있었다. 각기 자기 측 취미에 맞추어
가죽으로 장정하고 금자로 표제를 박은 협정부도 각3권이 크게 보인다.
그속에는 우리가 그리지 않은 분할선이 울긋불긋 우리의 강토를 종횡으
로 긋고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 앉아 있는 이곳이 우리 나라인가, 이렇
게 의아한다. 그러나 역시 우리가 살고 죽어야 할 땅은 이것밖에 없다고
순간적으로 자답하였다. 〉.

조선일보 최병우 기자가 1953년7월27일에 쓴 '백주몽과 같은 11분간
의 휴전협정 조인식' 기사(7월29일자 신문)는 계속해서 '휴전회담에 한
국을 공적으로 대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리하여 한국의 운
명은 또 한 번 한국인의 참여 없이 결정되는 것이다'고 전했다.

강원도 양구에 있는 3군단 포병사령부에서 휴전을 맞은 박정희 대령
은 그래도 살아남은 쪽에 속했다. 국군 전몰자(전사, 실종 포함) 약 32
만명, 유엔군(대부분이 미군) 전몰자 약 5만8천 명, 국군 전상자 약 83
만명. 적어도 그는 1백15만 명에 달하는 아군 전사상자(전사상자)에는
속하지 않았다. 중공군과 인민군의 전사상자는 적어도 아군의 5배 이상
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남북한의 민간인 피해까지를 포함시키면 전 인구
의 약 20%가 생명과 신체상의 직접피해를 당했다는 추산이 가능하다.5인
가족 중 한사람꼴로 피해를 당했던 셈이다.

6·25동란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전쟁임을 보여준 것이 8사단 10연
대 소속이었던 국군포로 양순용 일등병의 최근 귀환이다. 휴전 직전인
7월13일 중공군은 점령지를 확대하기 위하여 중부전선 금성 돌출부에 대
한 최후의 대공세를 펴 9㎞까지 남하하는 데 성공했다. 그 대가로 중공
군은 약 6만6천 명의 전사상자를 냈고 한-미군은 약 1만5천 명의 전사상
자(실종, 포로 포함)를 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양순용이었다. 이승
만 대통령이, 우리의 국익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전쟁을 끝내려는 미국에
대해 마지막 승부수로 던진 것이 6월18일의 일방적인 반공포로 석방이었
다.

유엔군 관할 하에 있던 2만7천여 명이 풀려나자 공산군은 휴전협상을
중단했고, 미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이란 당근으로써 이승만을 달래려고
했다. 이 반공포로 석방에 대한 보복으로 북한정권은 약 4만2천 명의 국
군포로를 억류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양순용 일등병
이었다. 오늘날 대한민국 안보의 주춧돌 중 하나인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양순용을 비롯한 이들 미귀환 포로들의 희생을 딛고 있다. 미국 정부는
지금까지도 북한지역에 남아있는 미군의 유해까지 발굴-송환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는데 우리 역대 정부는 살아있는 미귀환 포로들의 문제조차
한번도 북한 측에 제대로 제기하지 못했다. 양순용이 귀환하여 언론에서
문제를 삼자 우리 군의 일각에서는 "누가 그 골치아픈 자를 데리고 왔나"
라는 극언을 하고 있고, 정부의 모처에선 가족들에게 "기자들과 만나도
국군포로들에 대해서는 입을 닫아라"는 주문을 했다고 한다. 6·25참전
자가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은 국군은 3년 전에 6·25기념 포스터를 만
들면서 '형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눠야 했던 아픈 기억'이란 여고생 취
향의 글을 적었다. 남북대치 상황에서 총을 잡은 군인들에게 적개심을
잊도록 만들면 군대는 청년단이 될 가능성이 있다.

휴전 당시 전선에는 미군 9개 사단 약 36만 명, 한국군 14개 사단에
약 45만 명이 있었다. 군대라는 거대한 조직이 한국에 등장한 것이다.이
조직은 전쟁을 치르면서 가장 젊고, 가장 많이 훈련되고, 가장 오래 교
육되고, 가장 먼저 국제화된 선진집단으로 성장했다. 이 패기에 찬 조직
을 부리는 정치집단은 상대적으로 노쇠하고 구태의연하여 결국은 이 야
생마의 고삐를 놓치게 된다. 박정희가 8년 뒤 집권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선진집단에 속했기 때문이었다. '대통령 박정희'는 한국전의 산물이다.

한국전은 20세기 4대 전쟁의 하나로서 국제공산주의의 확산에 최초의
제동을 걸었다. 트루먼 행정부는 6·25남침을 소련의 세계 적화전략이란
관점에서 파악하고 당장 다음해(1951년)부터 국방비를 3배로 늘려 본격
적인 대결전력을 추진한다. 중공이 대만침공을 위해 예비한 병력을 한국
전에 투입하는 바람에 대만이 구제되었고, 일본은 경제부흥의 결정적인
계기를 잡았다. 1989∼91년 사이에 있었던 동구와 소련의 붕괴, 그 씨앗
은 한국전에서 뿌려진 것이다. 한국전에서 흘린 국군의 피는 조국뿐 아
니라 자유세계의 수호에도 기여했다. 전쟁은 참혹하지만 전쟁에서 뿌려
진 피는 역사를 전진시키고 살아남은 사람들을 보다 안락하게 만든다.군
인의 피는 가장 비싸고 고귀한 것이다.

'일이 인간을 만든다'는 관점에서 볼 때, 휴전과 함께 박정희가 포병
장교가 된 것은 그의 리더십 형성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포병은 보병
에 비해 입체적-조직적-수학적이다. 보병의 개인화기와는 달리 포병의
대포는 목표를 보지 않고 사격하여 맞추어야 한다. 간접사격능력을 향상
시키기 위해서 관측과 측도를 통한 거리, 방향 등 사격제원의 계산이 따
른다. 첫 포탄이 목표지점에 떨어진 뒤에도 이를 관측하고 오차를 수정
하여 완벽한 적중률에 도달하도록 관리해간다. 이런 관측, 발사, 오차수
정의 과정은 조직을 운영하고 일을 완수해가는 계획-실시-점검과정과 일
치한다. 포병의 5대 요소는 사격지휘, 전포대, 측지, 통신, 관측이다.포
병은 여러 가지 요소의 조직적 결합에 의하여 목표를 적중시킨다.

발사각과 방향을 정확하게 산출해도 풍향과 기온에 포탄은 민감하게
반응하여 탄착지점을 달리한다. 목표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변화무쌍한
상황에 대한 융통성있는 대응이 따라야 한다. 화력, 기동, 융통성을 특
성으로 하는 야전포병은 몸과 몸이 부딪치는 보병보다는 후방에 있음으
로해서 전쟁을 넓게, 객관적으로 성찰할 수 있다. 자연히 포병장교는 문
제를 시스템적으로 사고하는 안목과 습관을 갖게 된다. 포병장교 나폴레
옹처럼 박정희도 이 포병술을 부대뿐 아니라 국가운영에 잘 적용한 사람
이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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