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집고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127)

뉴스
입력 1998.03.13 14:05




## (8) "미국놈" ##.

대구10·1폭동은 조선경비대를 좌경화시키는 한 계기가 되었다. 경찰
에 쫓기던 많은 좌파 젊은이들이 피난처 삼아 군에 입대했다. 경찰에 대
한 증오심으로 무장한 이들은 좌익의 비율이 가장 높았던 하사관들에 의
해서 공산주의자로 교육되었다. 박정희가 생도2기로서 교육을 받고 있던
1946년11월 태릉주둔1연대에서 사병으로 근무했던 김춘근(뒤에 특무대
장교)은 이렇게 말했다.

"밤엔 전기공급이 되지 않아 병영에 촛불을 켰습니다. 그러면 좌익세
포들이 쏘다니면서 포섭활동을 벌이곤 했습니다. 군내의 남로당 거물
최남근은 '우리 군내의 좌익은 32%다'라고 했는데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교육을 받고 있던 박정희의 2기생 중에는 대구사범
후배가 한 사람 있었다. 서억균. 성격이 괄괄한 그는 공석이던교장의 대
리자 이치업 생도대장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일본군 소위 출신인 이치업
부위는 군기확립을 강조하면서 생도들에게 깐깐하게 대하고 있었다('창
군전사'). 12월 들어 졸업을 한 열흘 앞둔 날 이치업 부위는 생도들을
모아 놓고 서억균 등 생도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경고했다고 한다(2기생
박중근의 증언). 그 며칠 뒤 한밤중에 서억균은 목총을 들고 이치업이
자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이 부위의 머리를 난타하여 인사불성으로
만든 뒤 목총을 철조망 밖으로 버리고 내무반으로 돌아왔다. 이치업은
병원으로 후송되어 소생했고 서억균 등 5명의 생도가 퇴학당했다. 박정
희는 정권을 잡은 뒤 서억균을 많이 도와주었다고 전한다.

박정희의 2기생도들은 1946년12월14일에 졸업했다. 교육중 69명이 탈
락하고 1백94명이 졸업했다. 성적순으로 군번을 받았다. 1등은 신재식
(육군소장, 군수기지사령관 역임), 박정희는 3등이었다(군번은 10166).
같은조건에서 경쟁 하는 박정희의 육사성적은 1등(만주군관학교예과) 아
니면 3등(일본육사 유학생대). 이는 박정희의 지능지수가 매우 높다는
것을 암시한다. 박정희 소위는 춘천에 본부가 있던 8연대에 배속되었다.
8연대는 1947년2월, 미군이 38선 경비업무를 일부 이관하자 다섯 곳에
경비초소를 설치하게 되었다. 경비중대장은 경비사관학교 1기 김점곤(육
군소장 예편·경희대 교수) 중위였다. 원용덕 연대장이 장교들을 소집하
여 경비초소(CP)의 위치와 소대장의 배치장소를 의논하는데 미군 고문관
브라운이 "소대장의 서열에 따라 배치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다. 박정
희가 면전에서 버럭 신경질을 냈다.

"미국놈이 왜 간섭을 하나.".

브라운은 '미국놈'이란 욕을 알고 있었다. 원용덕 연대장이 "미국놈
은 애칭이지 욕이 아니다"고 변명해도 통하지 않았다.

"내가 타이피스트한테 들어서 아는데 미국놈은 욕이다.".

브라운은 박 소위의 징계를 요구했으나 원만한 원용덕이 적당히 달랬
다. 원용덕이 한 번은 장교들에게 "장교들도 이제는 영어를 배워야 한다"
고 훈시했다. 박정희 소위가 정색을 하고 "이것이 미국 군대입니까, 한
국 군대입니까"라고 대들었다. 제4경비 초소장 박정희 소위는 송청 지역
의 38선 경비를 맡았다. 주요 임무는 38선을 넘어 오는 월남인들을 조사
하는 일이었다. 그때는 38선에 철책이 쳐있지도 않았고 병력이 깔려 있
지도 않아 남북간 왕래가 꽤 이루어지고 있었다. 술과 줄담배가 취미인
박정희는 지휘소가 있는 폐광촌에서 막걸리를 직접 제조하여 마시고 있
었다.

막걸리를 병에 넣어 책상 옆에 두고 물마시듯 하였다. 한번은 김점곤
중대장이 청주 한 병을 사가지고 왔다가 박정희의 이런 모습에 놀라 물
었다.

"아니, 술 담글 줄 압니까?".

"제가 문경에서 선생질할 때 하숙을 했는데 하숙집 여주인이 주막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여주인으로부터 막걸리 담그는 법을 배웠지요.".


8연대 소대장 박정희가 38선을 지키고 있던 1947년4월5일 강릉에 있
던 같은 연대 제3대대에서 고급하사관 수십 명이 작당하여 송요찬 대대
장을 습격했다. 송 대위는 달아났다. 하사관들은 장교들을 두들겨 팬뒤
감금하고는 병기고를 열어 무장했다. 송 대위가 지나치게 훈련을 엄격하
게 시키고 외출을 금지시킨 데 대한 불만을 이용하여 강릉지역의 남로당
세포가 하사관들을 선동하여 일어난 준반란이었다. 미군이 출동하여 겨
우 진압할 수 있었다. 주모자 30여명은 월북했다. 이런 유의 항명사건은
부대마다 빈발했다. 근대식 군대를 가져보지 못한 우리 나라 청년들은
군대규율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불만을 풀려고 했다. 하사관
과 장교들의 부하통솔 수준도 문제였고, 여기에다 좌익의 선동이 끼여들
었다. 이즘의 군대는 노사분규 현장 같은 느낌을 줄 때도 있었다.

8연대의 38선 경비임무는 1947년5월에 끝났다. 박정희 소위는 춘천의
연대본부로 돌아와서 작전참모대리로 임명되었다. 이즈음 박정희는 남로
당간부인 이재복과 접촉하고 있었다. 김점곤은 "박정희가 친척이라고 속
여 이재복을 자연스럽게 술자리에 초대한 뒤 원용덕 연대장과 나에게 소
개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김점곤은 "뒤에 생각하니 이재복이 우리를
포섭하러 왔던 것 같았다"고 덧붙였다. 이재복은 좌익이 결성한 경북도
인민위원회에서 선전부장 황태성과 함께 보안부장을 지냈다. 대구폭동
후에는 도피중이었다. 그는 동년배인 박상희와도 친분이 있었다. 평양신
학교를 나온 뒤 목사로도 일했다는 이재복은 군대 내의 남로당 조직을
관리하는 군사부책이었다. 여러 가지 가명을 쓰고 있던 그는 박상희가
경찰한테 죽은 뒤 박정희에게 접근한 것으로 보인다. 춘천에서 박정희
소위는 봉급을 받으면 박상희 유족에게 거의 전액을 송금했다고 한다.보
기가 딱하여 김점곤 중위는 자주 술을 사주곤 했다. 박정희가 구미에 내
려가 보니 이재복이 박상희의 유족을 도와주고 있었다는 것이다(숙군 수
사때 박정희의 자술서를 읽은 김안일 특무과장 증언). 박상희의 유족은
이재복의 지원설을 부인하고 있다. (계속)
"조갑제 출판부부국장 ·이동욱 월간조선 기자).





화제의 뉴스

李대통령 분당아파트 29억에 팔리면 차익 25억…양도세는 1억대?
"1년 새 35% 증발" 갑자기 사라진 전세 매물 수수께끼
강남 재건축 갭투자 대박 이한주, 양평 농지도 신고…"투기 목적 아냐"
대통령發 강남3구 집값 하락…버블 붕괴 신호탄 될까
개포우성4차, 시공사 선정 재시동…'래미안 유력' 속 내홍 재점화

오늘의 땅집GO

대통령發 강남3구 집값 하락…버블 붕괴 신호탄 될까
파르나스·롯데·신라도 뛰어든다…특급호텔, 실버타운 진출 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