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집고

[콩트] 아내가 먼저 죽는다면.........이승우

뉴스
입력 1997.11.24 19:05





'내 아내가 나보다 먼저 죽는다면.'.

그녀는 남편 책상 위에 펼쳐진 수첩에서 그 문장을 읽었다. 우연이었
다. 걸레질을 하려고 책상을 정리하던 그녀 눈에 그 해괴한 문장이 들어
오지 않았다면 그녀는 남편 수첩에는 관심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내
아내가 나보다 먼저 죽는다면? 그것은 바로 그녀 자신에 대한 이야기였
다. 어떻게 그냥 수첩을 덮어버릴 수 있겠는가? 첫 문장을 읽은 이상 불
가능한 일이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었다.

'19세기까지 대다수 사람들의 기대수명은 매우 낮았다. 영국의 경우
17세기 후반까지 기대수명은 32년에 불과했으며, 독일 어떤 지역에서는
27년밖에 되지 않았다. 한 남자가 한 여자와 죽을때 까지 함께 사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은 그런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평균 수명이 70세를
넘긴 시대에 그런 악령을 떠받들어야 하는지 의심스럽다.

예컨대 10년은 열정이 식고 환상이 꺼지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10년
쯤 된 부부의 삶은 껍데기 삶이다. 열정없이 대화하고 습관에 따라 껴안
는다. 마지못해 산다. 책임감과 습관으로 사는 삶을 진정한 삶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런 사람들에게 유일한 탈출구가 있다면 배우자의 이른 죽음일 것이
다. 10년을 넘기지 않고 죽어주는 사람은 한때 일심동체였던 남편이나
아내에게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최고의 서비스를 하고 가는 셈이다.상
당한 유산, 또는 고액 보험금을 남겨주고 간다면 금상첨화.'.

그녀 얼굴은 저절로 붉어지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말을 잘 하지 않는
그를 향해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했던 친정 어머니 말이 생각났
다. 말로 그의 마음 속에 그런 생각이 들어있을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녀는 며칠 후면 결혼 10주년이 된다는 걸 기억해냈다. 현실의 남편
이, 바로 그녀 남편이 자기의 죽음을 바라고 있다니, 아무래도 끔찍했다.
보험금까지 언급하고 있는 대목에서는 토악질이 나오려고 했다.

그녀는 그 길로 나가 친정으로 달려갔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불
을 뒤집어쓰고 누워있는 그녀에게 식구들이 무슨 일이냐고 다그쳤다. 한
나절이나 입을 봉하고 있던 그녀는 마침내 눈물을 펑펑 쏟으며 자기가
친정으로 도망쳐온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녀 남편에게서 친정으로 전화가 걸려온 것은 거의 자정이 다 된 시
간이었다. 아내의 귀가가 너무 늦어지자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보다가 혹
시나 하고 처가에 전화를 넣은 것이었다.

"자네하고 안 산다네." 장모가 무겁고 노기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가 우리 딸 죽기를 바란다면서? 올해가 결혼한 지 10년 되는 핸
데, 이젠 죽었으면 한다며?".

남편은 전화기 옆에 있는 자기 수첩에 얼른 눈을 주었다. 아내가 수
첩을 보았구나,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왜 웃나? 이사람, 왜 웃는거야?"
"집사람 좀 바꿔주세요. 제가 왜 웃는지 이유를 설명할게요.".

그러나 아무리 구슬리고 달래도 아내는 전화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하는 수 없이 자정 넘은 시간에 손수 차를 몰고 처가로 달
려갔다.

"내 수첩 봤지? 왜 남의 수첩을 훔쳐보고 그래?".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서 외면하고 있는 아내의 뒤통수에 대고 그가
실실 웃으면서 말했다.

"그건 말이야, 내가 쓸 콩트 제목이야. 신문사에서 그런 주제로 특집
을 꾸민대. 당신도 알지, 문화부 한기자 말이야. 그 친구가 그런 내용으
로 콩트를 써달래. 그래서 집에 있는 책을 보면서 이것저것 메모를 해본
거야." 남편은 자기 수첩을 들고 흔들며 킬킬 웃었다.

잠시 후에 잠잠하던 아내의 이불이 아주 조금씩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은 점점 커졌고, 이불 밖으로 그녀의 킬킬거리는 소리가 빠져
나왔다.

< 이승우 · 소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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