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1.07.21 03:06
[땅집고] 20대 남성 A씨는 최근 소개팅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알게 된 여성 B씨와 만나 식사까지 함께 했다. 이날 자리에서 B씨는 “마침 직장이 근처에 있는데, 사무실을 구경시켜 주겠다”고 제안했다. B씨에게 호감이 있던 A씨는 그의 직장까지 순순히 따라갔다.
그런데 B씨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수도권에 있는 한 지식산업센터 모델하우스였다. B씨는 자신의 상사인 팀장 C씨에게 A씨를 소개했다. C씨는 “지식산업센터를 분양받으면 입주자로부터 월세를 받을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향후 매각시 시세차익까지 거둘 수 있다”며 투자를 권유했다. 한 채당 분양가는 1억8000만원 정도였다. A씨는 계속 거절했지만 결국 압박감에 못이겨 분양계약서에 사인했다. 당장 청약금 300만원이 없어 일단 지갑에 있던 5만원만 내고, 나머지 295만원은 C씨가 대납해주기로 했다. A씨는 추후 대출까지 받아 C씨에게 빌렸던 청약금을 변제한 뒤 계약금 1800만원까지 입금했다. 하지만 그가 호감을 가졌던 B씨와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최근 A씨와 비슷한 일을 겪고 ‘분양 사기’를 당했다고 호소하는 20~30대 젊은 남성이 속출하고 있다. 온라인에서 알게 된 젊은 여성을 따라갔다가 강제로 지식산업센터 분양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정작 분양을 유도했던 여성은 연락이 끊겨 결국 돈을 날리게 됐다는 것. 피해자들은 온라인 사이트에 “투자금이 없다고 하자 모델하우스 관계자들이 스마트폰에 통합금융어플을 다운로드 받도록 강제해 얼마까지 대출받을 수 있는지 조회하기도 했다”, “신용카드 한도를 확인한 뒤 현금서비스를 받아 계약금을 내게 했다”는 글을 올리고 있다.
부동산 전문가들은 지식산업센터 분양대행사 관계자들이 분양률을 높이기 위해 속칭 미인계를 썼을 확률이 높다고 본다. 최근 규제가 없는 지식산업센터가 인기를 끌면서 신규 분양이 늘어나자, 분양률을 높이기 위해 고안해낸 신종 분양마케팅 수법이라는 것.
A씨처럼 지식산업센터 등 부동산 분양 상품을 강요나 협박에 의해 억지로 계약한 경우 법적으로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부동산 전문 변호사들은 형사 측면에서는 정황상 기망으로 인한 사기죄, 민사상으로는 분양계약취소와 분양계약금반환소송을 제기해볼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때 형사 소송은 여성 판촉원을 고용한 분양대행사에, 민사소송은 지식산업센터를 분양하는 시행사를 상대로 해야 한다.
그러나 변호사들은 현실적으로 승소 확률은 희박하다고 보고 있다. 형사 소송의 경우 피해자들이 미성년자가 아니라 투자 여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인지력을 가진 성인이기 때문이다. 본인이 직접 모델하우스를 방문해 분양계약서를 작성한 이상 사기죄가 성립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민사 소송은 시행사가 ‘분양대행사 멋대로 벌인 일이며 이에 대해 전혀 몰랐으므로, 분양 계약을 취소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면 분양계약금 역시 돌려받기 어려워진다. 사실상 피해자들이 위약금을 물고 계약을 파기해야 하는 셈이다.
윤명선 이김법률사무소 사무장은 “최근 소개팅 어플에서 만난 여성에 꾀여 반강제로 지식산업센터를 분양받은 젊은 남성 피해 사례가 늘고 있는데, 앞으로 이 같은 일이 사회적으로 크게 이슈가 될 경우 법원이 사기죄 성립을 고려해볼 수도 있다”면서 “지금으로서는 피해자들이 분양 계약시 통화 녹음이나 문자 내역 등 증빙자료를 갖고 있더라도 승소할 확률이 매우 적어보인다”고 했다. 엄정숙 법도종합법률사무소 변호사는 “피해자들이 ‘위협을 느껴 분양계약서를 반강제로 작성할 수밖에 없었다’고 호소하지만, 과거 판례에 따르면 야구방망이를 든 사람에게 협박을 당한 정도가 아니라면 강요죄라고 볼 수 없다. 성인인 이상 계약서에 서명하는 것에 따른 책임이 얼마나 큰지 인지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지은 땅집고 기자 leejin0506@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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