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1.01.13 05:03
[악몽이 된 도시재생] ④ “새 간판 달면 뭐가 달라지나요?”…헛돈 펑펑 쓰는 도시재생사업
[땅집고] “지난달 구청 직원들이 갑자기 멀쩡한 간판을 교체해주겠다고 했어요. 어차피 ‘도시재생사업 예산으로 하는 거니 주민들한테는 공짜’라면서 이 일대 점포주들을 설득하더라고요. 공무원들이 썩은 건물에 새 간판을 달면 뭔가 변한다고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서울 종로구 창신동 자영업자 A씨)
지난 7일 땅집고가 다시 찾은 ‘서울 도시재생 1호 사업지’ 서울 종로구 창신동. 변창흠 국토교통부 장관이 SH사장으로 재직하던 2014~2017년 ‘고쳐서 다시 쓰는 도시’를 표방하며 도입한 첫번째 도시재생 현장이다. 최근 이 지역을 남북으로 가르지르는 창신길에선 간판 교체 사업이 한창이었다. 서울시가 도시재생 사업의 하나로 창신길을 ‘간판이 아름다운 거리’로 조성하겠다며 오래된 점포들의 간판을 한글 중심의 친환경 LED간판으로 교체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성인 3~4명이 나란히 서면 꽉 찰 정도로 좁은 길을 따라 수십 년 된 낡은 점포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데, 출입구에 붙어있는 간판만 새 것으로 바뀌어 한눈에 보기에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주민들은 입을 모았다.
창신길 오르막길에 있는 ‘현대마트’가 대표적. 한옥 두 채를 이어붙인 주택 겸 점포다. 지붕에 비닐을 덮고 그 위에 돌을 올려놓는 등 건물이 무너져 내리기 직전 수준으로 낡아 있다. 한 주민은 “종로구청이 붙여준 높은 새 간판을 보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위태로운 느낌마저 든다”고 했다. 바로 옆 건물도 마찬가지다. '창신이발관’, '종합설비’, ‘고흥구찌’ 등이 입점한 빨간 벽돌 건물엔 외벽에 금이 가고 흰색 이물질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오로지 ‘간판’만 빛이 난다.
글씨만 무지막지하게 큰 촌스러운 간판이 아니라 제법 디자인 개념을 적용한 간판이다. 하지만, 새 간판에 대해 창신길 점포주들 반응은 싸늘하다. 주민들은 “구청에서 공짜로 간판을 바꿔주겠다고 해서 동의는 했는데, 아무리 봐도 세금 낭비 같다”고 말한다. 서울시가 간판 교체에 들인 비용은 11억원이다. 총 400여개 점포에 250만~300만원씩 썼다. 모두 서울시민들이 낸 혈세다.
간판 교체 과정에 대한 불만도 터져나온다. 창신길의 한 상인은 “간판을 달기 전 점포주들과 크기나 디자인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았다”며 “구청이 달아준 간판은 너무 작아서 이전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고 했다. 또 다른 상인은 “도로 3면에 접한 가게여서 간판을 3개 쓰고 있었는데, 구청에서는 무조건 1개만 지원 가능하다고 해서 115만원을 추가로 냈다”며 “불경기여서 가뜩이나 장사도 안 되는데 간판만 바꾼다고 장사가 잘되는 것도 아닌데, 괜히 사업 신청을 한 것 같다”고 했다.
종로구청 측은 창신동 일대 낡은 점포가 대다수여서 불법 간판이 많아 정비가 필요했다는 입장이다. 종로구청 관계자는 “간판이 너무 낡아 작년 여름 태풍 때 간판이 떨어져 2~3번 긴급 수리하기도 했다”며 “언젠가는 간판 정비가 필요했다”고 했다. 구청 측은 간판 교체사업 설명회에는 주민 20명 정도만 참여했지만, 점포마다 서면이나 유선으로 동의를 받았기 때문에 사업 진행에 대한 문제는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번 간판 교체가 도시재생사업의 부작용과 세금 낭비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라고 지적한다. 주거 환경이 계속 악화하고 있어 제대로 된 개발이 필요한 지역에 엉뚱하게 도시재생만 고집하다보니 간판 교체 같은 헛돈만 쓰게 된다는 것이다. 권대중 명지대 교수는 “주민 의견 수렴 없이 관 주도로 보여주기식 사업을 하다보니 계속해서 황당한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며 “지금이라도 도시재생 사업을 포기하고, 세금을 보다 생산적이고 급한 일에 쓰는게 옳다”고 말했다. /이지은 땅집고 기자 leejin0506@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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