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0.11.10 04:13
[땅집고] 서울 지하철 6호선 녹사평역에서 반포대교 방향으로 500m 정도 떨어진 곳에 용산공원 예정지를 마주보는 넓은 빈 땅이 나온다. 축구장 7개 면적(5만1753㎡)에 서울 한복판 금싸라기 땅으로 꼽히는 용산구 이태원동 옛 유엔군사령부(유엔사) 부지다. 동쪽으로는 대형 재개발 사업지인 한남재정비구역이 있고, 이태원 상권과 한강공원이 가까운 황금 입지다.
하지만 이 땅의 개발을 추진 중인 일레븐건설은 날이 갈수록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2017년에 땅을 샀는데 아직 인허가도 받지 못하고 있다. 일레븐건설은 “지난달 26일 서울시에서 환경영향평가 심의를 진행해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고 밝혔다. 주변 아파트 주민들이 일조권 민원을 제기하면서 인허가 기간이 길어졌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정부의 분양가 통제 정책이다. 업계에서는 “땅값만 1조원, 총 사업비 2조원에 달하는 투자금을 마련하려면 고분양가 책정이 필수적”이라며 “정부의 분양가 통제로 어떤 아이디어를 내도 사업성이 나오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보고 있다.
■ 분양가 규제로 6000억대 손실 예상
일레븐건설이 한국토지주택공사(LH)로부터 땅을 샀던 2017년 당시만 해도 장밋빛 전망이 나왔다. 당시 낙찰가는 1조552억원. 감정가보다 2000억원을 더 써냈지만 워낙 입지가 좋아 성공을 의심하지 않았다. 일레븐건설은 이 땅에 지하 7층~지상 20층 아파트 5개동 426가구, 오피스텔 2개동 796실, 호텔·사무실·복합시설 1개동을 짓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약 2조원을 투입해 2022년 12월까지 도쿄의 대표적 복합단지인 롯폰기힐스 한국판처럼 도심의 랜드마크로 만든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유엔사 부지 매입가격은 3.3㎡(1평)당 6700만원에 달한다. 대신F&I가 사들인 인근 한남동 외인(外人)아파트 부지 매입가격(평당 3300만원)의 약 두배다. 땅값이 비싼 만큼 아파트와 오피스텔 분양으로 많은 이익을 남겨야 한다. 업계에서는 평당 6000만원 정도는 돼야 사업을 진행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인허가를 진행하는 사이에 문재인 정부의 분양가 통제라는 예기치 못한 복병을 만나면서 계획이 틀어졌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고분양가 관리를 명목으로 사실상 분양가를 통제하는 가운데 지난 7월부터는 서울 민간택지에 분양가 상한제까지 적용한 것. 분양가 상한제가 적용되면 평당 4000만원대 이상 분양가를 책정하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다. 만약 평당 분양가가 예상보다 2000만원 낮아진다면 전체 공급면적10만7784㎡(약 3만3000평)에서 6600억원 정도 손해를 볼 상황이다.
■ 임대 후 분양도 골치…최소 10년 분양전환 어려워
업계에서는 유엔사 부지가 ‘나인원한남’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나인원한남’ 시행사인 대신F&I는 분양가를 평당 6360만원으로 책정했지만 HUG는 비싸다는 이유로 보증을 거절했다. HUG는 4750만원을 제시했었다. 의견 차가 좁혀지지 않자 대신F&I는 2018년 6월 ‘임대 후 분양’으로 사업 방식을 바꿨다. 분양가 통제는 받지 않지만 4년간 자금이 묶여 금융 비용이 커진다.
그런데 ‘나인원 한남’은 임대 기간 중 또 다시 폭탄을 맞았다. 정부가 지난 ‘7·10대책’을 통해 법인에 대한 종합부동산세율을 3.2%에서 6%로 대폭 올리면서 임대기간 중 예상 종부세 부담이 약 500억원에서 1000억원으로 2배 늘어난 것. 임대 기간 동안 종부세 부담을 버티기 어려워진 ‘나인원 한남’은 임대사업자 등록을 말소하고 내년 3월 조기 분양 전환하겠다고 발표했다. 입주민들은 시행사가 종부세 부담을 사실상 떠넘기고, 당초 예정보다 3년 앞서 잔금 계획을 짜야 하는 만큼 반발이 크다.
업계에서는 이런 상황을 고려했을 때 일레븐건설의 해법은 하나 밖에 없다고 본다. 장기 민간임대주택 사업자로 등록해 의무임대 기간을 준수하면서 종부세를 피하고 임대 종료 시점에 시세대로 분양하는 것. 하지만 의무 임대 기간이 10년이나 된다는 어려움이 있다. 지난 7·10대책으로 단기(4년) 민간 임대와 아파트 임대사업제도가 폐지되고, 아파트 건설임대의 경우 10년간 임대기간을 유지해야 종부세 합산 배제 혜택을 주는 탓이다. 심교언 건국대 교수는 “입지가 워낙 좋아 10년간의 금융·감가상각 비용보다 땅값 상승 이익이 더 클 수도 있다”며 “하지만 10년 후 시장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리스크가 워낙 커서 달가운 일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의 각종 규제 때문에 ‘나인원 한남’이나 유엔사 부지처럼 민간 사업자들의 아파트 개발이 어려워지면 결국 주택 공급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권대중 명지대 교수는 “유엔사 부지는 그나마 괜찮지만 입지가 떨어지는 땅은 아파트 개발이 어려워졌다”며 “정부의 부동산 규제가 지속되면 3기 신도시에도 뛰어들지 못하는 건설사가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상혁 땅집고 기자 hsangh@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