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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각하 기분 상쾌하게…" 강변북로 탄생의 비밀

    입력 : 2020.09.27 04:27

    인구 1000만명의 공룡 도시가 된 서울. 과연 서울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땅집고는 서울 도시계획 역사를 다룬 손정목 전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의 저서 ‘서울도시계획 이야기(한울)’의 주요 내용을 바탕으로 서울의 공간 구조 형성에 숨겨진 스토리를 살펴봤습니다.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① 한강변 아파트는 ‘전시 행정’의 산물이었다

    1956년 5월에 치러진 정·부통령 선거는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로 유명하다. 당시 정·부통령 선거에 앞서 민주당 후보였던 신익희·장면의 서울 선거유세 장소는 ‘한강 백사장’이었다. 당시 서울 인구는 160만명, 유권자는 70만명이었는데 이 한강 백사장 유세에 30만 인파가 몰렸다.

    [땅집고] 1956년 5월2일 한강백사장에서 개최된 야당 정·부통령 후보 정견 발표에 모인 30만 군중. 이 한강백사장은 지금의 동부이촌동이다./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손정목)

    당시 한강 백사장은 지금의 용산구 동부이촌동이다. 한강제방이 축조되기 이전 동부이촌동 제방은 경원선 철길 바로 옆에 있었다. 경원선 철길에서 흑석동까지 한강은 비가 오지 않을 때는 큰 백사장을 이뤘고 강물은 겨우 흑석동~노량진 언덕에 붙어 가늘게 흘렀다.

    오늘날 동부이촌동·잠실·압구정·반포동 일대 한강변에 거대한 택지지구가 만들어진 배경에는 김현옥 전 서울시장이 있다. 그는 ‘일에 미친 사람’이었다. 김현옥은 부임 첫해인 1966년 “한강변을 따라 제1한강교에서 김포공항까지 제방의 기능을 동시에 지니는 강변제방도로를 건설할테니 계획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이 김포공항을 이용할 때 논스톱으로 달릴 수 있으면 기분이 상쾌할 것’이라는 이유, 즉 전시 행정이었다.

    [땅집고] 1920년대 경원선의 모습과 한강, 서빙고 부근. 한강제방이 축조되기 이전인 1960년대 말까지 경원선 철길이 바로 한강제방이었다./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손정목)

    이 강변제방도로는 1967년 3월17일 착공했다. 당시 신문은 이 기공식을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워낙 많은 도로가 생기고 있을 때였다. 이 도로가 도화선이 돼 오늘날 강변도로와 한강변의 수많은 택지들이 생겨날 것을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도로는 그해 9월 23일 완공돼 ‘강변1로’라는 이름이 붙었다. 도로 개통후 첫번째로 달린 차량은 대통령 휘장을 단 박정희 대통령 전용차였다.

    이 도로가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을 때 김현옥은 희한한 것을 발견했다. 새로 생기는 강변도로와 기존 제방 사이에 2만4000평이라는 ‘새로운 택지’가 조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김 시장은 머리에 문득 스친 생각을 명령으로 전달했다. “한강 개발 계획을 세워라. 첫째, 여의도에 제방을 쌓아서 가능한 한 많은 택지를 조성한다. 둘째, 여의도와 마포·영등포를 연결하는 교량을 가설한다. 셋째, 한강을 사이에 두고 남북의 제방도로를 연결하는 교량을 축조함으로써 한강 홍수를 방지할 수 있을뿐 아니라 자동차가 고속으로 달릴 수 있도록 한다.”

    [땅집고] 1967년 9월 23일 개통한 '강변1로'. 제1한강교와 영등포를 연결하며 제방 역할을 동시에 한다./조선DB

    김 시장의 이른바 ‘한강개발 3개년 계획’ 핵심은 여의도 건설이었다. 다른 부수적인 효과는 ‘강변도로 축조’와 ‘공유수면 매립’이다. 이 때 시작된 한강의 9개 제방도로는 1974년쯤엔 거의 마무리 됐다. 1982년에 기공해 1986년 준공한 올림픽대로로 그 모습을 한차례 크게 바꾸었다. 올림픽대로가 완성되고 난 후에는 북안의 도로는 강변대로로 이름을 바꾸었고, 현재는 강변북로라고 불린다.

    1962년 이후 한강변에는 크고 작은 공유수면 매립 공사가 벌어졌다. 제방도로 건설로 얻어지는 택지를 매각해 다음차례 제방도로 축조 자금을 댔다. 동부이촌동이 그랬고 반포 아파트단지, 압구정동, 잠실이 이를 통해 주택 지구로 개발됐다. 공유수면 매립 사업에는 압력도 있었고, 정치자금 개입도 있었다. 국가기간사업 수행을 위한 자금조달이라는 명목도 있었다. 매립사업권을 따낸 민간인이나 기업체는 막대한 이득을 얻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공공 이익과 국민경제 발전에 기여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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