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0.09.07 05:20
[땅집고] 지난달 말 오후 6시가 조금 넘은 시각, 대전시 유성구 반석동의 지하철 반석역 2번 출구 앞 버스정류장에는 버스를 기다리는 퇴근길 직장인 20여명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버스 2~3대를 보내고서야 탑승이 가능했다. 세종시 대평동에 산다는 직장인 A씨는 “낮에는 25분이면 집에 갈 수 있지만 퇴근 시간에는 길이 막혀 10~15분 정도가 더 걸린다”며 “불편하긴 해도 대전보다는 세종시 주거 환경이 좋아 세종시를 떠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 김태년 원내대표가 최근 ‘세종시 천도론’을 꺼내든 이후 세종시 집값에 불이 붙었다. 아파트값 상승률이 3주 연속 2%대로 뛰고, 올해 누적 집값 상승률(33.6%)은 전국에서 압도적 1위를 기록했다. 부동산 업계에서는 행정수도 이전을 기대한 투기 수요가 집값을 끌어올린 것 아니냐고 해석한다.
하지만 현지 취재 결과, 실상은 조금 달랐다. 외부 투자 수요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세종시 주거 환경이 개선되면서 대전 등 주변 수요를 빠르게 빨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세종시 도담동의 금백부동산 관계자는 “‘천도론’은 불난 데 기름을 끼얹은 것뿐이지, 이전부터 세종시 아파트 가격은 타올랐다”고 했다.
■ “대전·충청 주택 수요 빨아들이는 블랙홀”
세종시가 출범한 2012년 이후 몇 년간 대전이나 청주 같은 주변 지역에 살면서 세종시로 출퇴근하는 직장인이 많았다. 세종시에는 별다른 편의시설이 없어 생활이 크게 불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종시 주거 여건이 좋아지면서 상황이 뒤집혔다. 정부 부처와 공공기관 이전이 진행되면서 BRT(간선급행버스)·광역버스 등 교통망 확충이 속도를 내고, 생활기반시설도 속속 갖춰졌다. 새롬동 일대 교육환경(학군)은 대전보다 오히려 낫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렇다보니 세종시가 아닌 주변 지역에 일자리를 둔 사람들이 세종시에서 살면서 출퇴근하기 위해 이주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세종시 인구 현황에서 잘 드러난다. 세종시 인구는 작년 말 기준 31만9000여명이다. 출범 첫 해(11만5000여명)보다 약 2.7배로 늘었다. 지난해 세종시로 전입한 인구는 5만8000여명인데 이 중 2만2180명(38%)이 대전에서 전입했다. 대전·충남·충북 등 충청권을 합하면 전체 전입인구의 60%가 충청권이다. 경기도 전입 인구는 7139명(12.3%), 서울은 5861명(10.1%) 등이다. 결국 세종시가 주변 지역 인구를 끌어들이고 있는 셈이다.
■ 대전 집값 먼저 뛴 뒤 세종으로 옮겨 붙어
세종시 집값이 뛴 것은 ‘천도론’이 고개를 들기 이전인 작년 말부터다. 세종시 바로 옆인 대전에서 작년 10월부터 집값이 급등했고, 곧바로 세종시로 영향을 미쳤다. 도담동의 금백부동산 관계자는 “대전 집값이 크게 오르다보니 세종시 집값이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느껴졌다”면서 “실제 대전지역 아파트에 투자해 시세차익을 본 투자자들이 고점에서 팔고 세종시 아파트를 매입한 경우가 많다“고 했다. 올 초부터는 세종시 집값 상승률이 오히려 대전을 앞질렀다. 대전의 올해 집값 누적 상승률(23.6%)은 세종시에 이어 전국 2위다.
천도론이 나오기 이전만 해도 대전과 가까운 세종시3·4생활권(대평동·소담동 일대) 집값이 먼저 올랐다. 이 지역의 경우 지은 지 5년 이내 신축 아파트인데 대전보다 집값이 저렴했다. 작년 8월까지 도담동 ‘호반 어반시티’ 84㎡(이하 전용면적) 매매가격은 4억7000만원으로, 대전 서구 둔산동 크로바아파트 같은 주택형(7억원)보다 2억원 정도 낮았다. 하지만 최근 도담동 ‘호반 베르디움’ 84㎡ 실거래가는 8억7000만원으로, 둔산동 크로바 아파트(8억9000만원)와 격차가 2000만원으로 크게 줄었다.
■ 천도론 나오자 세종시 전역이 들썩
천도론이 나온 이후로는 세종시 전역으로 매수세가 확산했다. 특히 정부청사가 있는 도담동 일대와 상권·학원가가 발달한 새롬동 일대 아파트 가격이 급등했다. 도담동 도램마을10단지 아파트 84㎡는 천도론이 나온 이후 10여일 만인 지난달 31일 8억7000만원(9층)에 거래가 이뤄져 이전 가격보다 1억3000만원 올랐다. 새롬동 새뜸마을 10단지 아파트 59㎡도 지난달 27일 6억5000만원(15층)에 팔리며 3주 전보다 5500만원 올랐다.
세종시에서도 저평가받았던 고·아·종(고운동·아름동·종촌동) 일대 집값도 움직였다. 이곳은 지난해 충남대병원 개원과 함께 올 1월 BRT 보조노선과 광역버스 개통으로 교통 환경이 개선하고 있다. 도담동의 뉴욕부동산 관계자는 “최근 집값 상승은 천도론에 따른 거품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호재가 있는 아파트가 집값 상승을 견인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했다.
■ “개발 70% 밖에 안됐다…20년 끄떡없다?”
전문가들은 수도 이전이 안 되더라도 세종시 집값 강세가 꺾이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신축 아파트가 많고 주거 환경이 좋아지면서 대전·청주·천안 등 인근 지역 인구를 계속 빨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 개발 계획이 한창 진행 중이어서 세종시 일자리가 늘어나면 인구 증가는 더 가속화할 전망이다. 권대중 명지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세종시는 아직 개발이 70%밖에 진행되지 않았다”며 “앞으로 산업단지가 들어오고 트램(노면전차)이 도입되면 이주 수요가 더 몰릴 가능성이 높아 개발을 진행하는 향후 20년 간은 집값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반면 과잉 공급으로 집값 거품이 꺼질 수도 있을 것이라 보는 전문가도 있었다. 이광수 미래에셋대우 리서치센터 연구위원은 “정부청사에서 근무하는 공무원들을 수용할 주택이 이미 충분한 상태라 외곽 유휴부지들에서 이어질 공급을 감당할 수요를 찾기 어려울 수도 있다”고 했다. /세종=전현희 땅집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