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0.04.08 05:23
경기 침체가 이어지며 작년 말 전국의 상가 공실률이 역대 최고(중·대형 기준 10.8%)로 치솟았다. 곳곳에서 문 닫는 점포가 속출하고 있다. 땅집고는 ‘벼랑 끝 상권’ 시리즈를 통해 몰락하는 내수 경기의 현실과 자영업자들의 목소리를 담아 전한다. 열 번째 현장으로 약령시장을 찾았다.
[벼랑 끝 상권]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약령시장 한방테마상가
[벼랑 끝 상권]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약령시장 한방테마상가
지난달 31일 오후 2시쯤 서울 지하철 1호선 제기동역 2번 출구로 나오자마자 ‘서울 약령시(藥令市)’라고 써진 나무표지판이 보였다. 표지판 위쪽에는 녹용, 인삼, 소나무, 영지버섯 등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그림이 걸려있다. 대로변을 따라 천막을 펴고 각종 약재와 떡·전통과자 등을 함께 파는 노점상들이 줄줄이 자리잡고 있다. 최근 코로나 여파로 상권이 북적북적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노점상 한 곳마다 멈춰서 물건을 구경하는 중장년층 방문객이 적어도 서너명씩은 있었다.
약령시장에는 소규모 노점상 뿐 아니라 ‘불로장생타워’, ‘한솔동의보감’ 등 한약재나 한방용품을 주로 파는 전문상가들도 자리잡고 있다. 이들 전문 상가 건물의 분위기는 노점의 분위기와는 전혀 달랐다. 2006년 준공한 지하 2층~지상 16층 규모 ‘건강백화점 동의보감’ 건물. 건물 1층 출입구는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건물 관리인은 “지상 9~17층 오피스텔만 사용 중이다. 상가가 언제부터 문을 닫았는지는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안 난다”라고 했다.
2004년 입주한 상가 건물 ‘한솔동의보감’도 비슷했다. 지하 2층~지상 7층, 연면적 20만1989㎡짜리 상가다. 건물 외벽에 ‘사무실 및 상가 임대문의, 평수다양’이라고 적힌 빛바랜 대형 현수막이 걸려있다. 1층에는 한약재로 만든 건강식품을 파는 매장 십수곳과 한의원 등이 입점해있었지만, 이 날 각 점포에서 물건을 사는 사람을 찾아 보기 힘들었다. 2층은 아예 셔터가 내려져있었다.
우리나라 대표 약령시로 꼽히는 제기동 약령시장. 1960년대 말 한약재상들이 이 곳에 모여들면서 전국 한약재 유통량의 80%를 차지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2000년대부터는 한약재 및 건강보조식품 유통을 체계화하기 위한 대형 한방전문상가들도 생겨났다. 상인들은 대형 건물이 들어서면 상권이 더 활성화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약 20년이 지난 지금 이 전문 상가들은 모두 ‘유령건물’이 됐다.
■”단골장사하는데 테마상가가 웬 말”
제기동 한방전문상가는 부동산 업계에선 ‘테마상가’로 분류된다. 테마상가란 한 가지 품목을 주로 판매하는 점포 여러 개를 한 건물에 집약시킨 형태를 말한다. 2000년대 들어 우후죽순 공급됐다. 대형 건물을 3평 정도의 소형점포로 쪼개서 분양하는 것이 특징이다. 한 건물 당 점포 수가 700~900여개에 이른다. 건물 하나만 들어서도 공급자가 수백명이 동시에 생겨나고, 그 결과 공급 과잉 상황이 벌어진다. 건물 2~3동이 공급되면 아예 상권 자체가 붕괴된다. 실제로 의류를 주로 파는 동대문 ‘밀리오레’, 전자기기를 취급하는 용산 ‘전자상가’와 신도림 ‘테크노마트’ 등 국내 테마상가들이 비슷한 과정을 거쳐 상권이 무너졌다.
당초 제기동에 이런 한방테마상가를 지은 것은 상권 분석에 실패한 결과라는 지적도 나온다. 제기동 대로변에서 한약 노점상을 운영하는 A씨는 “대형건물 시설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점포를 옮기면 단골들을 잃어버리는 데 어떤 장사꾼이 저기 들어가겠느냐”며 “한번 들어갔던 상인들도 다시 나온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경매로 줄줄이 넘어가는 한방테마상가들…헐값에도 낙찰 안돼
제기동 약령시장 한방전문상가를 분양 받은 투자자들은 원금손실을 보고 있다. 점포 하나 당 분양가가 1억~3억원 선으로 저렴하다는 점에 혹해 노후대비용으로 분양 받았는데, 임차인을 구하지 못해 대출이자와 관리비만 내고 있다. 15~20년 전 분양 당시 광고 전단에 ‘월세 100만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상가가 지금은 월세를 20만원 정도 받고 있다. 그래도 입점하는 상인이 거의 없다.
한방전문상가들은 ‘헐값’에 경매로 나오고 있다. ‘불로장생타워’는 2011년 2.7평짜리 11층 44호 점포 감정가가 1억6000만원이었는데, 2015년 비슷한 크기의 6층 점포 감정가가 5839만원(103호, 2.4평)으로 책정됐다. 지난해에는 7층 77호 점포 감정가가 1600만원(1.1평)이었다. 경매 업계에선 테마상가는 경매에 싼값에 나오더라도 한 점포가 2~3평으로 너무 작고, 다른 업종도 입점하기 힘들어 주인을 찾기 어렵다고 말한다.
테마 상가들이 상황이 ‘폭망’ 상태로 방치돼있는 만큼 정부 차원에서 이런 상가를 정리해 임대 주택이나 주거용 오피스텔로 활용하는 방안도 고려해 볼 수 있다. 물론 상가를 주택으로 바로 바꾸는 것은 현행 법상으로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법은 바꾸면 된다. 특히 서울은 늘 주택은 부족하고, 임대주택을 짓기 위해 서울시와 정부가 엄청난 세금을 쏟아붓고 있지만 그래도 집은 부족하다. 게다가 테마상가는 대부분 역세권에 있어 입지도 좋고, 주변 편의 시설도 풍부해 리모델링만 하면 쓸만하다. 권강수 상가의신 대표는 “온라인 시대에 한번 망한 상가를 살리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이럴 바에야 정치권에서 나서 법을 개정해 상가를 임대주택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찾아 보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지은 땅집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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