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0.01.26 05:47
“재건축하면 강남의 랜드마크 아파트가 될 거라더니, 서울시가 디자인을 뜯어고치는 바람에 ‘주공 아파트’처럼 지어지겠네요. 정말 안타깝습니다(인터넷 커뮤니티 이용자 A씨).”
지난달 23일 서울 송파구 잠실동 ‘미성·크로바아파트’ 재건축 조합이 공개한 설계안을 본 조합원들은 깜짝 놀랐다. 2017년 시공사로 선정된 롯데건설이 제안했던 아파트 설계안과는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당초 롯데건설은 ‘미성·크로바아파트’를 잠실의 랜드마크 단지로 만들기 위한 초호화 특화설계를 선보였다. 단지 입구에 짓는 ‘월드 트리플타워’ 3개동의 최상층을 연결하는 290m 길이 스카이브리지 3곳, 타워 측면에 LED(발광다이오드) 조명을 설치해 영상을 보여주는 220m 규모 미디어파사드, 전면 커튼월 등이다.
그런데 지난해 서울시가 ‘미성·크로바아파트’ 조합 측에 “공공성을 높이고 주변 경관에 어울리는 설계로 변경하라”라고 요구하면서 이 같은 특화 설계가 전부 빠지게 됐다. 서울시 요구에 따라 ‘공공성 높은 디자인’을 하다보니 직사각형 아파트를 줄지어 세운 20~30년 전 아파트 설계가 나왔다. 조합원들 사이에선 “절대 권력을 가진 서울시에 저항해서는 재건축 사업을 진행할 수 없으니 시의 지침을 따르는 수 밖에 없다”, “성냥갑 아파트는 안된다고 할 때는 언제고 지금은 이런 디자인을 요구하느냐”는 불만이 쏟아져 나온다.
■’특별건축구역’이라면 성냥갑 아파트 감수해야?
조합 내 불만은 많지만, 재건축 사업에 절대 권한을 가진 서울시는 ‘미성·크로바아파트’ 설계안이 바뀐 게 당연하다는 입장이다. 조합이 원하는대로 해당 아파트 부지를 ‘특별건축구역’으로 지정하려면, 아파트 외관 디자인에 대한 서울시 제안을 수용해야 한다는 것.
현재 서울시는 특별건축구역에 짓는 건축물에 대해 건페율, 건축물 높이, 일조권 등 건축규제를 일부 완화해주고 있다. 대신 이 구역에 신축하는 건축물은 주변 환경과의 조화 및 공공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게 서울시의 주장이다.
실제로 특별건축구역으로 지정된 대신 ‘특화설계’를 포기하라는 ‘다이어트’ 주문을 받은 서울 재개발·재건축 사업장이 많다. 2018년 신반포15차아파트 조합은 서울시 건축위원회에 특화설계를 포함한 정비계획안을 제출했다가 재검토하라는 주문을 받았다. 서울시는 조합에 “(아파트 외관이) 도시경관상 위압감을 준다”라며 “스카이브릿지 특화설계를 축소 또는 삭제하고, 일부 동 상부에 연결한 장식물과 커튼월(통유리벽) 설치를 재검토하라”라는 의견을 전달했다.
지난해 신반포4지구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당초 경부고속도로변에 접해있는 아파트 2개동 최상층을 스카이브리지로 연결하고 여기에 인피티니풀과 스카이라운지를 지을 계획이었지만, 서울시가 “도로 경관을 해칠 수 있다”는 의견을 내면서 설계안을 고쳐야 했다. 광진구 자양1구역 재건축 조합도 스카이브리지 특화설계를 포함한 정비계획안을 냈다가 보류 판정을 받았다.
■서울시 “특화설계는 집값 올려” VS 조합원 “앞뒤가 안맞는 행정”
서울시의 설계안 변경 요구로 정비사업이 지체되고, 외관 디자인이 ‘성냥갑’처럼 바뀐 곳이 늘어나자 업계 및 조합원들 사이에서는 “앞뒤가 맞지 않는 정책”이라는 말이 나온다. 서울시는 특별건축구역을 ‘자유로운 건축 설계가 반영된 창의성 높은 복합단지 조성이나 지역 랜드마크 건설을 촉진하기 위해’ 지정하는 구역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 지난해 서울시가 ‘도시건축혁신안’을 발표하면서 “서울을 채우고 있는 천편일률적인 ‘성냥갑 아파트’를 탈피하는 창의적인 단지 디자인을 유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실제 서울시의 지침은 전혀 딴판이다.
서울시가 특화설계를 삭제하는 기준 역시 애매하다는 지적도 있다. 지난해 서초구 반포동 ‘래미안 원베일리(신반포3차·경남아파트 재건축)’는 한강과 가까운 동(棟)에 스카이브릿지를 설치하는 계획안을 제출했는데도 건축위원회 심의를 통과했다. 어떤 아파트는 되고, 어떤 아파트는 안된다는 명확한 설명도 없다.
한 정비사업구역 조합원은 온라인 부동산 커뮤니티에 “이미 스카이브리지 등 특화설계를 포함해 지어진 단지가 서울 곳곳에 많은데, 이제와서 규제해봐야 의미 있을지 의문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인허가권을 가진 서울시가 ‘성냥갑 아파트’로 지으라면 현실적으로 거역할 수도 없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올라오고 있다.
서울시가 성냥갑 아파트 디자인을 강요하는 이유는 디자인이 독특하고, 차별화되면 이 때문에 집값이 오르는 요인이 된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앞으로 아파트에 스카이브리지, 커튼월룩 등 주거환경에 불필요한데도 집값을 띄우기 위한 목적으로 적용한 디자인 설계는 지양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심교언 건국대 교수는 “애초에 서울 아파트 가격이 특화설계 등 디자인으로 정해지는 것도 아닌데 재건축 사업장에 유독 ‘성냥갑 아파트’를 지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공산주의나 다름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지은 땅집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