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9.04.16 06:00
“주택재개발, 아파트 재건축 시행시(중략) 서울특별시 동물보호과 흑은 귀 구청 동물관련 부서로 통보하여 길고양이 서식지 이주 등 구역내 동물보호가 원만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끝.”
지난해 9월 서울시가 강동구에 보낸 공식 문서다. 문서 이름은 ‘주택재개발 사업 추진시 동물관련부서 통보 협조요청’. 재개발·재건축 사업에 길고양이 대체 서식지를 마련하라는 내용이다. 국내 최대 규모 재건축 단지로 꼽히는 ‘둔촌주공아파트’가 이주 단계에 들어가자 약 200마리에 달하는 동네 고양이들이 살 곳을 잃었다는 얘기가 나오자 공문을 보낸 것.
시는 이 공문을 재개발·재건축 관련 법에도 넣기로 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지난 3월 19일 ‘동물 공존 도시 서울 기본계획’에서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을 개정해 앞으로 서울 정비사업장에 동물 보호를 의무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윤민 서울시 동물보호과 주무관은 “현행법상으로는 조합원들에게 강제성을 부여할 수 없기 때문에 도시·주거환경정비법에 해당 조례를 추가하려는 것”이라며 “올해 안에 개정하기로 확정한 상태이며, 들개·길고양이들을 서울시가 단독으로 관리하기는 사실상 어려워 민간업체와 협력하는 방안을 추진할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아파트 재개발·재건축 사업에 제동을 걸고 있는 서울시가 ‘개·고양이 이주대책’이라는 카드까지 꺼내들었다. 서울시가 강남권 주요 아파트 재건축 인허가 과정에서 층수(35층 이하)와 용적률 등을 이유로 줄줄이 인허가를 반려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일이다. 해당 지역 주민 사이에선 “전면 철거는 나쁘고 보존과 재생만 좋다고 보는 박원순 시장의 개인적인 철학과 신념을 재개발·재건축 사업에 반영하면서 황당한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는 불만이 쏟아져 나온다.
■서울시, 정비사업 디자인부터 관여한다
지난달 12일 박 시장은 기존 정비사업과정에 ‘사전공공기획’ 단계를 추가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도시·건축혁신안’을 발표했다. 서울시 도시계획국(국장 권기욱)의 도시계획과(과장 양용택)이 담당 부서다. 혁신안에선 각 조합이 정비계획을 수립하기 전부터 서울시가 아파트 구조·층수·디자인 등에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 안을 통해 앞으로 서울시는 주택정비사업 과정의 처음부터 끝까지 개입할 수 있게 된다.
가장 먼저 불만을 제기하고 나선 건 은마아파트·잠실주공5단지 등 기존 재건축·재개발 조합원들이다. 그동안 시가 요구하는대로 건축 계획을 변경했는데도 심의를 거절당해왔는데, 서울시가 사전 관여 권한까지 갖게 된다면 앞으로 사업 추진 문턱이 더욱 높아질 것이란 걱정 때문에 ‘정비사업 정상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번 발표로 아직 정비계획을 확정하지 않은 단지들은 사전공공기획 단계를 통해 서울시가 마련한 아파트 디자인 기준을 따라야 한다. 하나의 거대 단지로 조성됐던 아파트를 중소단지 여러 개로 재구성해 사이 사이에 보행로를 넣고, 이 보행로 주변에 시민 개방형 커뮤니티 설치하는 등이다. 이미 사업시행인가를 받고 시공사를 선정한 단지라면 서울시가 기용한 공공건축가들로 이뤄진 도시건축혁신단·공공기획자문단 등의 감독을 추가로 받아야 한다.
■700가구 규모 아파트도 ‘환경영향평가’ 대상
최근 서울시가 ‘환경영향평가 조례’를 개정해 환경영향평가 대상을 확대한 것도 개발 규제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기존에는 2000가구 이상(9만~30만㎡) 대규모 재개발·재건축 단지만 평가 대상이었는데, 오는 7월부터는 연면적 10만㎡ 이상 건축물이라면 무조건 평가를 거쳐야 하는 것.
이에 따라 정비 사업 속도를 내던 700~800가구 이상 중소 규모 아파트들에 비상이 걸렸다. 강남구 대치동 ‘대치우성1차(710가구)’와 도곡동 ‘도곡개포한신(620가구)’ 등이다. 당초 환경영향평가 대상이 아니었던 단지들이지만, 이번 개정으로 예산을 추가로 들여 평가를 실시해야해서 조합 관계자들의 불만이 높아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박 시장 철학, 공급 부족 낳을 수도” 우려
지난 8일 ‘골목길 재생 시민 정책 대화’ 행사에 참석한 박 시장은 “사람들이 개미구멍처럼 (집에) 찾아 들어가면 옆집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른다”며 “과연 이것이 서울의 미래이고 우리의 행복한 삶을 보장하는 것이냐”고 말했다. 이는 고층 아파트 재건축 및 재개발을 억제하고 원형을 보존한다는 박원순표 도시 개발에 대한 비판 여론에 정면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박 시장의 고강도 규제가 계속되면 재산권 행사 뿐 아니라 결국에는 주택 공급으로 이어져 오히려 주택난이 심화될 수 있다며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서울은 가용택지가 적어 주택 공급 수단이 사실상 재건축·재개발 뿐이기 때문이다. 주택산업연구원에 따르면 서울시의 연평균 신규 주택 수요는 약 4만가구다.
고종완 한국자산관리연구소장은 “서울시가 아무런 논의나 예고 없이 부동산과 관련한 일방통행격 정책들을 쏟아내면서 불필요한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