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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아시아도 좁았는데…몰락한 용산전자상가

    입력 : 2018.04.18 06:31

    지난 5일 오후 서울 용산구 용산역. 지하철역 3번 출구 방면에 용산전자상가로 이어지는 보행교가 설치돼 있었다. 작년 10월 서울드래곤시티호텔이 오픈하면서 기존 보행교를 새로 수리한 것. 하지만 호텔을 지나 전자상가로 가는 통로는 썰렁했다. 용산 전자랜드 안으로 들어가니 대기업 A/S센터와 오디오 기기를 판매하는 매장들이 나타났다. 판매원들이 인사를 건넸지만 매장 안을 둘러보는 고객은 2~3명에 불과했다.

    평일 낮이기는 해도 유동 인구가 너무 적었다. 스피커가 빽빽하게 놓인 상점 안에는 물품만 놓여 있을 뿐 주인도 자리를 비운 경우가 많았다. 큰길 뒤편 작은 상가들은 더 썰렁했다. 노후한 건물 내부에는 조명도 어두워 발길을 옮기기도 어려웠다.

    대기업 전자제품 A/S센터와 오디오 및 음악 기기 상점이 모인 전자랜드 내부. /김리영 인턴기자

    1987년 7월 문을 연 용산전자상가는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연 매출 10조원을 웃돌아 ‘아시아 최대 규모 IT 메카’로 불릴 만큼 상권이 발달했다. 하지만 온라인 쇼핑이 확산되고 주력 상품이던 PC 수요가 급감하면서 용산전자상가 상권은 몰락했다. 용산 전자상가의 평균 공실률은 20%가 넘을 만큼 상권이 위축됐다. 현재 용산 전자상가는 소매 기능은 거의 상실하고 온라인 전자제품의 창고로 변한 상황이다.

    ■청년 모이면 ‘아키하바라(秋葉原)’처럼 살아날까

    용산전자상가 상권이 되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서울시는 지난 4월 3일 이 일대를 도심 재생으로 되살리겠다며 ‘Y밸리 혁신사업’을 발표했다. 이곳에 젊은 창업 인구를 끌어들여 활기를 되찾게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2020년까지 약 200억원을 투입할 예정이다.

    서울시는 원효상가 2·3층에 6000㎡ 규모로 젊은 창업자들이 아이디어를 시제품으로 구현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다. 3층에는 청년들이 아이디어를 나눌 수 있는 강의실을 둬 고려대·연세대 등 5개 대학의 현장 캠퍼스로 운영한다. 또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 용산구 창업지원센터 등 11개 기관이 입주하기로 했다.

    용산역 제1·2공영주차장(1만 5566㎡) 부지에는 행복주택 등 청년·1인가구를 위한 주택과 문화 복합시설이 들어설 예정이다. 용산 아이파크몰에서 서울드래곤시티호텔까지 이어지는 보행교(141m) ‘무빙워크’도 설치할 계획이다.

    강희은 서울시 재생정책과장은 “용산전자상가처럼 수도 한복판 교통 인프라가 집약된 곳에 IT관련 산업이 대규모로 밀집된 곳은 세계적으로도 찾기 힘들다”며 “서울 강북에는 대학도 많아 젊은층이 모일 수 있는 유인장치만 있으면 도심 재생이 성공할 승산이 크다”고 말했다.

    선인상가 일대. / 김리영 인턴기자

    ■전자제품 매장 뿐인 상가 업종 전환이 더 시급

    서울시가 발표한 'Y밸리 혁신사업' 세부계획. / 서울시 제공

    서울시는 Y밸리 혁신사업이 성공할 것이라고 자신감이 넘친다. 하지만 정작 용산전자상가에서 만난 상인들은 대부분 고개를 갸우뚱했다. 상인들은 서울시 대책이 상권 활성화와 거리가 멀다고 보고 있다. 선인상가 구분소유자관리단 박선길 회장은 “ Y밸리 혁신 사업은 용산 활성화 대책이 아니라 현 정부가 좋아하는 ‘청년실업 대책’인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상인들은 상권을 활성화하려면 전자제품 매장만 가득한 용산전자상가에 다양한 놀거리·볼거리 매장이 들어서야 한다고 말한다. 일본의 대표적 전자 매장이었던 아키하바라(秋葉原)가 침체에 빠졌다가 다시 살아난 것도 전자 제품 매장 위주의 상권에서 애니메이션과 게임 관련 문화·엔터테인먼트 유통 공간으로 바뀌면서 경쟁력을 회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용산 상인들은 이 사실을 알면서도 규모가 영세하고 업종 전환에 대한 교육도 받은 적이 없어 변화하려는 시도조차 못하고 있다.

    일본의 전자상권의 중심지 '아키하바라' 거리. / 위키백과 제공

    용산전자상가 연합상인회 장병군 회장은 “전자제품 팔다가 하루 아침에 옷가게, 식당으로 바꾸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며 “정부가 청년 교육이나 창업뿐만 아니라 상인의 업종 변화를 유도할 교육 프로그램도 적극적으로 구축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미래가치는 충분, 정책 지원만 잘되면 가능해”

    용산전자상가가 현재 고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미래가치 측면에선 용산이 최고의 입지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 이견이 없다. 용산역 일대는 이미 초대형 주상복합과 아모레퍼시픽 등 대기업 사옥이 줄줄이 입주하면서 스카이라인이 바뀌었다. 무산됐던 용산국제업무 개발 사업도 법정 공방이 정리되면서 오는 6월쯤 서울시 마스터플랜이 나오면 사업이 재개될 전망이다.

    용산 국제업무지구 조감도. / 조선DB

    실제로 용산전자상가 일대에선 ‘큰 손’들이 토지와 상가를 매입하기 위해 이미 움직이고 있다. 대형 상가 중 하나인 나진상가는 사모펀드와 디벨로퍼가 서로 매입하기 위해 혈투(血鬪)를 벌이고 있다. 지난해 7월 나진상가 지분 50.9%를 중견 디벨로퍼 서부티엔디(T&D)의 자회사 오진상사가 인수하기로 계약까지 했다. 하지만 최근 사모펀드 IMM인베스트먼트가 위약금(300억원)을 내고도 남을 높은 인수가격을 제시하고, 주주들의 마음도 바뀌는 바람에 분쟁이 발생했다.

    전문가들은 용산전자상가의 입지가 우수하고, 미래 가치도 충분한 만큼 서울시가 제대로 된 지원과 정책 방향만 제시한다면 상권이 되살아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최막중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대학 창업센터와 청년들을 용산에 모을 수 있다면 효과가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면서 “당장 상인들의 숨통을 틔우기 위해 서울시의 문화 콘텐츠를 용산에 배치해 유동인구가 늘어날 수 있도록 하는 현실적인 대책도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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