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04.11 06:55
지난 6일 오전 대기업 본사들이 밀집한 서울 세종로사거리를 지나 종로3가로 들어서자 빽빽하게 들어선 낡은 상가들이 나타났다. 그 사이로 지난해 9월 일부 리모델링을 마친 세운상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리모델링했다는 세운상가 일부 건물 외관은 깨끗하게 정비돼 허름한 주변 건물과 대비됐다. 세운상가는 세운·청계·대림·진양 등 총 7개 동(棟)의 대형 상가를 통칭해서 부르는 말이다. 세운상가 건설 당시에는 7개 상가의 2층에 사람들이 걸어다닐 수 있는 보행로가 설치됐다.
2013년부터 지난해 9월까지 1단계 리모델링으로 세운·청계·대림상가 3개동의 일부가 새 단장을 했다. 리모델링을 끝낸 구간은 겉만 봐서는 새로 오픈한 대형 쇼핑몰을 연상케할만큼 깔끔했다.
그러나 이곳을 오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깔끔하게 공사를 끝낸 공중 보행로나 옥상 공원은 물론 상가 안으로 들어가봐도 손님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TV·전자제품·조명 가게들이 입점한 상가 내부에는 통로마다 박스들이 쌓여있어 사람 한 명이 겨우 다닐 정도로 좁았다. 손님은 커녕 가게 주인도 없는 경우가 많았고, 비었거나 문 닫은 상점도 곳곳에 있었다.
세운상가는 서울시가 내세우는 ‘도시재생’의 대표적인 사례다. 기존의 전면 철거 후 재개발 방식 대신, 원래 있던 건물을 그대로 둔 채 리모델링 등으로 일부만 고쳐나가는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이 환경 개선이나 상권 활성화에 큰 효과를 낼 수 있을까에 대한 우려도 높은 것이 사실이다.
땅집고는 세운상가의 도시 재생이 어떤 성과를 내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직접 현장을 살펴봤다.
■판자촌 헐고 지은 국내 첫 주상복합…한때 산업 중심지
세운상가는 윤락업소와 판자촌이 있던 자리를 정비해 1968년 문을 연 상가다. ‘세상의 기운이 다 모인다’는 뜻으로 이곳을 ‘세운상가’라고 이름 붙였다. 세운상가~진양상가로 이어지는 7개 건물이 남북으로 1km길이로 이어진다. 지상 4층까지는 상가, 5층부터는 공동주택으로 이뤄진 국내 최초 주상복합 아파트이기도 하다.
세운상가는 1980년대 초까지는 기계·공구·철물·전자제품 기업들이 몰려 들었고, 상층부 아파트는 연예인과 유명인사 등이 거주하는 고급 주거단지였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용산 등에 전자상가가 늘어나고 강남 일대가 본격적으로 개발되면서 세운상가는 그 명성을 잃어갔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낡은 건물들이 방치되면서 30년 넘게 사실상 ‘죽은 상권’이 됐다.
■‘전면 철거’에서 서울시장 바뀌자 ‘옛 모습 보존’
낙후된 세운상가를 다시 살리는 일은 모든 서울시장들의 목표였다. 세운상가 재생 사업이 본격 추진된 건 2006년이다. 당시 오세훈 서울시장은 세운상가 7개동과 주변 상가들을 6개 구역으로 나눠 전면 철거 후 녹지와 고층 주상복합·상업판매시설 등을 만든다는 계획을 세웠다. 종묘 맞은편 현대상가가 철거됐고 그 자리에 초록띠 공원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오 시장이 세운 계획들이 본격 추진되려고 할 때쯤 서울시 수장이 박원순 시장으로 바뀌면서 계획이 전면 백지화됐다. 박 시장은 2013년 기존 6개 구역 중심에서 남북으로 이어지는 세운상가 7개 동을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두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세운상가 7개 동을 리모델링하면서 공중에 보행교를 설치해 보행자들의 유입과 상권 활성화를 이룬다는 이른바 ‘다시 세운’ 프로젝트다.
‘다시 세운’ 프로젝트의 1단계 사업은 560억원이 투입된 끝에 지난해 9월 마무리됐다. 세운상가 북쪽(세운·청계·대림상가)을 정비해 제조업 창업기지로 만들고 세운상가 입구부터 청계상가까지 남북 보행로를 복원해 설치했다. 1단계는 세운상가 보행교를 새로 수리하고 연결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무허가 상인들이 차지했던 보행교 양옆 공간에는 스타트업 기업이 입점할 수 있는 업무시설도 만들었다. 세운상가 옥상에는 데크를 깔아 옥상 정원과 전망대를 설치했다.
2단계 사업은 지난달 27일 발표됐다. 2022년까지 나머지 구역을 창작 인쇄사업 중심지로 개발하고 세운상가와 청계상가에 지어진 보행로를 잇겠다고 했다. 2단계 사업이 완료되면 7개 건물 전체가 보행길로 연결된다. 이 사업이 마무리되면 종묘에서 시작해 세운상가를 거쳐 남산까지 이어지는 남북 보행축이 생긴다. 2020년까지 세운상가 남쪽(삼풍상가~호텔PJ~인현상가~진양상가)을 창작·인쇄 산업 중심지로 조성할 계획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다시 세운 프로젝트를 통해 세운상가 일대에 기술 장인과 청년의 협업을 통해 통한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며 “현재 1단계 사업에 속한 상가군에는 20개 정도의 스타트업 기업들이 입주했다”고 했다.
서울시는 이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상가동 주변 6개로 나뉜 재정비 지구에 대해서도 전면 철거 대신 소규모·자발적 개발 방식을 택했다. 6개 구역은 다시 총 171개로 분할됐다. 도시 경관을 보전한다는 취지로 건물 높이는 최고 90m로 제한된다. 4구역의 경우 문화재청 심의 결과에 따라 종전 122.3m에서 62m로 제한했다. 각각의 재정비 구역들은 개별 리모델링을 추진하거나 여러 구역이 합쳐 건물을 지을 수 있도록 했다.
■“폐차에 새 타이어 갈아끼운 격”
서울시가 내세운 ‘다시 세운’ 프로젝트 목표는 거창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별다른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세운상가 7개동은 여전히 빈 점포로 썰렁하고, 주변 재정비구역에 속한 가게들도 슬럼화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상가 상층부에 지어진 아파트들 역시 낡아가고 있는데 별다른 대안이 없다.
세운상가에 입점해 있는 상가와 건물 소유주, 주택 소유주 간의 이해관계를 어떻게 조정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이 거의 없는 상황이다. 재생 전 1단계 구간은 점포의 40% 정도가 비어 있었다. 그나마 서울시가 기존 세운상가 보행로에 자리했던 무허가 상인들을 입점하도록 유도한 덕에 공실이 줄어든 것은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상인들의 반응은 신통치 않다. 상인 이모(70)씨는 “서울시 발표는 거창하지만, 여전히 세운상가에는 손님이 없고, 입점하는 상인도 거의 없다”며 “폐차에 타이어만 새 것으로 교체한 것과 다름없지 않느냐”고 했다.
세운상가 주변 171개 재정비 구역도 자발적인 리모델링 등을 통한 개발이 쉽지 않다. 2구역 일대의 한 부동산 중개업소 관계자는 “구역을 세분해 놓으니 확실한 추진 동력을 가진 사업자나 개인이 없어 개발 자체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면서 “서울시가 난개발(亂開發)을 조장하는 꼴”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세운상가 일대의 장기적인 침체와 슬럼화를 우려했다. 박상언 유앤알컨설팅 대표는 “10년 넘게 정책이 오락가락하는 바람에 개발 동력이 상실된 것이 제일 큰 문제”라며 “거기다가 현재 세운상가 도시재생은 청년이나 젊은 창업인들에게 업무 공간을 제공한 것에 불과해 상권 활성화를 꾀하기 어려워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