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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아파트 공화국'의 그늘] 1970년대 강남개발의 상징… 80년대부터 전국 확산

    입력 : 2009.11.02 03:04

    아파트에 미친 한국, 어떻게 시작됐나

    1960년대 대도시로 인구가 몰려 주택난이 가중되자, 정부는 서민용 주택으로 아파트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게 1968년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이 추진한 시민아파트 건설. 김 시장은 판자촌 급증에 따른 영세민 주거문제 해결을 위해 판자촌을 허물고, 그 자리에 4년간 2000동(棟)의 시민아파트를 짓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1970년 4월 33명의 인명을 앗아간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로 이 사업은 '날림 공사'란 오명을 쓴 채 중단되고 말았다.

    서민용 아파트 건설이 실패로 끝나자, 정부는 중산층 이상을 겨냥한 아파트 건설로 방향을 틀었다. 대표적인 게 서울 용산 동부이촌동 일대 아파트 단지였다. 이 아파트는 종전과 달리 3000가구가 넘는 대규모 단지형이었고, 중·대형이 많았다. 당시 한강맨션 아파트의 계약자 1호는 탤런트 강부자였고, 배우 고은아·문정숙, 가수 패티김 등도 구입하면서 화제가 됐다. 1970년 12월 당시 장동운 주택공사 총재는 "이 사업이 대성공함으로써 본격적인 아파트 시대가 열리게 됐다"고 회고했다.

    이를 계기로 정부는 1972년 주택건설촉진법을 제정하면서 아파트 대량 공급 체제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에 따른 첫 작품이 바로 서울 강남(江南) 개발이다. 1974~75년 동작대교 남단 일대 반포지역에 5층짜리 아파트가 대거 건설됐다. 이 아파트는 분양 당시 엄청난 인파가 몰리며 대히트했고, 3년 뒤 아파트 추첨제가 도입되는 계기가 됐다. 1977년엔 서울 잠실에 반포를 능가하는 제2의 초대형 아파트 단지가 건설됐다.

    정부 주도 아파트 공급이 성공하자, 민간 참여도 본격화됐다. 선구자 역할을 한 게 현대건설이 지은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였다. 당시 현대건설 정주영 사장은 베트남 전쟁에 따른 건설 특수가 끝나면서 남아도는 해외 인력과 장비를 투입해 아파트를 지었다. 1975~77년에 완공된 이 아파트는 30~80평대로 중산층 이상이 입주했다.

    1970년 말부터 시작된 아파트 건설 붐은 1980년대 목동(1983년 착공)과 상계동(1986년 착공)의 신시가지 건설로 이어졌다. 당시 전두환 정부는 1981년부터 1995년까지 15년간 주택 500만가구 건설계획을 발표하며, 아파트 공급 확대에 불을 댕겼다. 이 정책은 노태우 정부에서 주택 200만호 건설 계획으로 바뀌면서 아파트 공급이 가속화됐다.

    전문가들은 아파트 건설 비중이 전체 주택의 80%대까지 치솟은 것은 정부 주택정책 때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최민섭 서울벤처정보대학원 교수는 "정부가 신속하게 값싼 주택을 공급하기 위해선 규격화된 주택과 고층·고밀화가 필요했고, 아파트가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땅값이 비싼 수도권뿐만 아니라 수요가 적은 지방까지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조성하면서 땅값 급등 등 부작용도 커지고 있다. '부동산114' 김희선 전무는 "주택공급이 남아도는 지방에서도 아파트 위주의 신도시와 택지지구를 건설해 땅값이 치솟는 등 부작용도 발생했다"고 말했다.

    차학봉 차장대우 hccha@chosun.com(팀장)

    유하룡 기자 you11@chosun.com

    이석우 기자 yep249@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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