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8.10.17 03:23
서초구 16억 아파트 3억 떨어져 팔 엄두도 못내
분양 당시 가격보다 떨어진 아파트도 '수두룩'
서울 강남에 사는 이모(48)씨는 2006년 4월, 서초구에 있는 A아파트 165㎡(50평)를 16억원에 샀다. 가격은 좀 비쌌지만 집값이 계속 올라가는 상황이어서 무리해서라도 투자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자금은 그동안 모아두었던 2억5000만원과 대출금 8억원, 전세금으로 받은 5억5000만원으로 충당했다. 그러나 최근 이 아파트의 가격은 13억원 정도. 이씨는 "내년 봄이면 대출 이자에다 원금까지 갚아야 하는데 전세금 시세마저 떨어지고 있다"며 "이제는 집을 팔아도 대출금과 전세금도 갚지 못할 처지"라고 말했다.
올 들어 주택 가격이 가파르게 떨어지면서 서울 강남에서도 '깡통' 아파트가 속출하고 있다. 아파트 값이 대출금과 전세보증금을 합한 금액 밑으로 떨어져 지금 집을 팔아도 큰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주택들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대출금·전세금도 못 갚아요"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박모(45)씨는 2년 전, 엔화 대출로 8억원을 빌려 서초동 B아파트 138㎡(42평)를 14억3000만원에 구입했다. 그러나 이 아파트의 현재 시세는 12억원. 문제는 대출 원금. 그동안 엔화 가치가 두 배 가까이(1엔당 770원→1357원) 급등함에 따라 박씨가 갚아야 할 대출 원금이 8억원에서 14억1000만원으로 늘어 현재 집을 팔아도 대출금을 상환할 수 없게 된 것.
분당·용인 등에서도 '깡통 아파트' 현상은 마찬가지이다. 분당에 사는 김모(51)씨는 2006년 말 용인 신봉동 C아파트 133㎡(40평)를 대출금과 전세금 4억5000만원으로 5억3000만원에 샀다. 그런데 이 아파트는 현재 4억2000만원에 내놓아도 팔리지 않는다. 김씨는 "용인 집값이 크게 오르는 것을 보면서 투자 목적으로 샀는데 이제는 은행 이자만 한 달에 100만원 이상 나간다"며 "이러다 더 큰 손해를 볼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분양가 아래로 떨어진 아파트도 속출
집값 급락으로 최근 시세가 분양가격을 밑도는 '마이너스 프리미엄' 아파트도 나오고 있다. 부동산정보업체 '스피드뱅크'에 따르면, 4개월 전 후분양 방식으로 공급한 서초구 반포동 D아파트 116㎡(35평)의 평균 분양가격은 11억2100만원. 하지만 이 아파트의 조합원 물량은 10억5000만원에 매물로 나와 있다. 인근의 한 공인중개사는 "조합원들은 예전에 재건축 아파트를 상대적으로 싸게 샀기 때문에 가격을 낮춰서라도 빨리 처분하려는 경우도 많다"며 "하지만 매수세가 완전히 끊겨 거래로는 잘 이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비슷한 처지의 아파트들도 강남에 수두룩하다. 지난 8월 입주를 시작한 강동구 E아파트 109㎡(33평)의 분양가는 3억9950만원이었으나 현재 시세는 3억9000만원. 반포의 F아파트 267㎡(80평)의 시세 역시 21억~23억원으로 2004년 당시 분양가(24억6120만원)보다 1억5000만원 이상 낮아졌다.
'스피드뱅크' 박원갑 소장은 "경기 침체로 집값이 계속 떨어진 데다 올해 서울 잠실에 입주 물량이 쏟아져 수요자들이 매수에 나서지 않고 있다"며 "분양 받은 후 지불한 대출이자까지 감안하면 집 주인들의 손해가 더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시세의 80~90% 대출, 여전히 성행
'깡통' 아파트 속출은 무엇보다 은행 등 금융기관의 저금리 조건에 현혹돼 무리하게 대출을 받아 투자한 탓이 크다는 분석이다. 더 큰 문제는 부동산 시장 안정을 위해 정부가 2006년 11월 주택담보인정비율(LTV) 등 대출 규제를 강화하는 조치를 내놓은 후에도 저축은행·할부금융사 등이 과도한 대출을 부추겼다는 것.
즉, 투기지역에서 LTV가 40% 이내로 묶인 은행권과 달리 제2금융권과 대부업체들은 지금도 아파트 시세의 80~90%까지 돈을 빌려주고 있다. 지금도 서울 잠원동이나 여의도동 일대 아파트 밀집 지역에는 '아파트 100% 추가 담보 대출', '아파트 특판 대출'이라고 적힌 현수막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연세대 서승환(경제학) 교수는 "정부의 최근 공식 통계로는 은행의 LTV 비율이 48%로 나오고 있지만 제2금융권 등을 포함하면 70~80%로 올라갈 것"이라며 "금리가 오르고 주택가격이 하락하는 상황에서 대출을 무리하게 받은 집주인들이 급매물을 쏟아낼 경우 금융시장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