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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현지서 본 韓·日 버블 비교 불행한 판박이?

    입력 : 2006.05.22 00:08 | 수정 : 2006.05.22 00:35

    “거품 꺼지면 가계충격 일본보다 심각”
    현대경제硏 부동산 보고서

    청와대와 재경부, 건교부 등이 ‘부동산 버블(bubble·실제가치 이상으로 부풀어 오른 거품가격) 붕괴론’을 주장하는 가운데, 부동산 버블이 한꺼번에 터질 경우 우리나라 가계가 겪을 충격은 1990년대 일본이 겪었던 장기불황보다 더 심각할 것이라는 분석 보고서가 나왔다.

    현대경제연구원은 21일 발표한 ‘국내 부동산, 일본형 버블과의 유사점과 차이점’이란 제목의 보고서에서 “일본의 경우처럼 우리나라도 부동산이 높은 가격을 유지하고 거래부진이 동반되는 ‘부동산 스태그플레이션’ 과정을 겪은 뒤 버블이 붕괴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그 근거로 “2000년대 이후 주택 실수요 가구의 증가율이 떨어지면서 주택시장의 초과수요가 사라지고 있고, 여기에 경제의 저(低)성장까지 겹치면 ‘부동산 불패신화’가 깨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1990년 일본 세금폭탄→대출 조이기→금리인상 뒷북 →급격한 거품붕괴→10년불황
    2006년 한국 세금폭탄→대출 조이기→금리인상   →      ?     →      ? 
    보고서는 이어 “부동산 버블이 붕괴되면 주택담보 대출 등을 통해 거품 형성을 주도해온 가계가 직격탄을 맞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우리나라 부동산 버블의 규모가 과거 일본에 비하면 작은 편이지만, 부동산 가격이 급락할 때 가계와 금융기관이 연달아 부실화되는 ‘복합불황’이라는 점에서 비슷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일본은 중소 부동산업자들이 투기용으로 매입한 사무실용 토지가 버블을 키웠지만, 우리나라는 가계가 사들인 주택(아파트)이 버블대상이라는 점에서, 버블 붕괴시 ‘가계발(發) 복합불황’이 주는 충격은 더욱 심각할 것이라고 보고서는 진단했다.


    도쿄 인근 지바(千葉)현에 15년 만에야 입주자를 채운 초호화 맨션이 있다. 이름은 ‘원헌드레드힐즈’. 1989년 7월 첫 입주자 모집 당시 120평의 분양 가격은 최고 14억엔(약 120억원)에 달했다. 입주 경쟁률 20대 1. 순식간에 팔려나갔다.

    그해 말 주가 하락이 시작되고, 이른바 ‘토지신화’도 1991년부터 붕괴되기 시작했다. 이 맨션은 불행히도 부동산 경기가 하강을 시작한 시점에 완공됐다. 계약 포기자가 속출했다. 처음 완공된 49호 중 25호가 빈 집으로 남았다.

    그나마 입주자가 속속 빠져나가 1990년대 후반 주민이 살던 집은 60호 중 단 3호에 불과했다. 이 맨션은 15년이 지난 2004년 2억~4억엔에 팔아 겨우 입주자를 채웠다. 그래도 아직 5호가 빈 집으로 남아 있다.

    1980년대 후반 일본에서 부동산 거품을 만든 주역은 ‘부동산 담보대출’로 손잡은 기업과 은행이었다.

    그러나 거품을 무리하게 꺼뜨리려다 경제 전체를 ‘잃어버린 10년’의 장기불황에 빠뜨린 것은 정책당국이었다. 당시 일본 정부가 범했던 실책을 복기해 보면 지금 한국 정부가 하고 있는 일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주게 한다.

    ◆세금폭탄 엄포

    1990년 3월 23일. 일본 대장성(한국의 재경부)이 금융회사에 통달(通達)을 날렸다. “부동산융자 증가율을 융자총액 증가율 이하로 억제하라”는 내용이었다. ‘부동산융자 총량규제’라는 일본 경제사에 남는 행정규제였다.


    (도쿄=선우정특파원 su@chosun.com)
    부동산 거품 붕괴 전야(前夜)이던 1990년 12월. 일본 정부는 국민을 상대로 ‘세금 폭탄’을 때려대기 시작했다. “내다팔지 않으면 못 배기게 만들겠다”고 엄포 놓으면서 손댄 것이 역시 보유세였다.

    먼저 대장성이 ‘지가세(地價稅)’를 신설, 토지가격의 0.3%를 매년 세금으로 떼어가겠다고 했다. 지가세가 시행된 것은 부동산 폭락이 전국에 확산된 1992년. 그해 일본 백화점업계가 경상이익의 20%를 지가세로 떼였다는 통계는 ‘세금 폭탄’의 강도를 짐작케 해준다.

    이번엔 자치성(한국의 행자부)이 나섰다. 한국의 재산세에 해당되는 ‘고정자산세’의 산정 기준(평가액)을 일거에 공시지가의 70%로 끌어올린 것. 그때까지 평가액은 공시지가의 10~20% 수준이었다. 당시 일본 언론은 “대장성과 자치성이 국민에게 더블펀치를 날렸다”고 표현했다.

    일본 국민이 세금 고지서를 받기 시작한 것은 4년 뒤인 1994년. “땅값이 떨어지는데 세금이 왜 늘어나는가”라는 조세 저항이 일본을 뒤덮었다. 지가세는 결국 국민 저항에 부딪혀 1998년 사실상 폐지됐다.

    ◆뒷북 친 금리인상

    중앙은행인 일본은행. 거품시대의 절정기였던 1989년 5월까지 팔짱만 낀 채 아무것도 안 했다. 1985년 플라자합의로 인한 ‘엔고(高) 불황’을 해소하겠다며 저금리(콜금리 연2.5%)를 2년3개월간 방치했다. 거품경제에 불을 때준 당시 행위는 일본은행의 ‘역사적 실책’으로 평가된다.

    1989년 5월, 뒤늦게 시작된 콜금리 인상은 1990년 8월까지 이어졌다. 1년3개월 동안 콜금리는 연 2.5%에서 무려 연 6%로 급등했다. 1990년은 이미 주가와 부동산값이 무너지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붓던 일본은행이 이번엔 꺼져가는 불에 물을 쏟아부은 것이다. 거품이란 무리 안 가게 서서히 빼는 것이지, 급격한 거품붕괴는 경제를 망칠 수 있음을 일본의 교훈은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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