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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년 집값 40% 뛰자 여론 앞세워 "하자"

    입력 : 2005.07.22 00:34 | 수정 : 2005.07.22 00:34

    “상위 5%가 땅 65% 가졌다” 분위기 조성
    ‘소유제한’ 3법 강행… 결국 시장서 퇴출

    1989년 서울 종로 5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사무실엔 토요일 오후마다 일군의 교수들이 모여들었다. 홍원탁(서울대), 강철규·이근식(서울시립대), 최광(외대), 김태동(성균관대·이상 당시 직책)….

    당시 폭발했던 사회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연구 모임이었다. 이 모임은 나중에 청와대 등에서 밀어붙인 ‘토지공개념’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게 된다. 모임의 한 관계자는 “청와대 사람들조차 전쟁이 나면 적 때문이 아니라 남한 내부 갈등으로 붕괴될 수 있다는 말을 하던 시절이었다”고 전했다. 강남 아파트가 한 시간에 1000만원씩 오른다는 얘기까지 나돌았다.

    1988년에만 전국 평균지가가 27.5% 상승하고, 서울 아파트값은 1년 새(1988.10~1989.12) 40%나 치솟자 특단의 부동산 대책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토지 공개념은 시작됐다.

    ◆문희갑 수석이 주도 = 89년 초 국토연구원은 처음으로 전국 토지 소유 실태조사를 발표, “상위 5%가 전체 민간 소유토지의 65.2%”를 갖고 있다”는 충격적 수치를 내놓았다. 정부가 분위기 조성을 위해 내놓은 자료였다.

    이를 신호탄으로 본격화된 토지공개념은 문희갑 당시 경제수석과 조순 경제부총리가 주도했다. 법무부는 위헌요소가 있다며, 재무부는 경제에 도움이 안 된다며 반대했다. 하지만 노태우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던 문 수석은 “재벌부터 돈많은 사람의 99%가 부동산으로 돈을 번 것이며 이를 두고 선 경제정의를 실현할 수 없다”면서 대통령을 설득했다.

    이 같은 움직임에 김태동 강철규 이근식 교수 등 경실련 멤버들이 지원했고, 실무작업은 건교부와 국토연구원에서 뒷받침했다. 청와대 산하에 ‘토지공개념연구위원회’도 만들어져 40여명 전문가들이 1년여 동안 매달렸다. 문 수석이 당초 구상한 토지공개념의 개념은 ‘1인1주택’의 매우 강도 높은 것이었다.

    ◆시장에서 ‘퇴출’ = 국민 여론의 힘을 입고 ‘토지공개념위원회’에선 택지소유상한제, 토지초과이득세 등의 각 분과를 구성해 본격적인 입법 작업에 돌입했다. 그해 8월 종합토지세제도 도입을 위한 지방세법 개정이 이뤄지고, 12월 30일엔 여소야대 국회에서 토지공개념 3법이 통과됐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통과된 3법은 이후 10년도 못가고 시장에서 모두 ‘퇴출’됐다. 국민 재산권 침해란 이유로 헌법소원을 제기당한 택지초과소유부담금제는 99년 4월 위헌판정을 받았고, 토지초과이득세 역시 같은 이유로 94년 7월 헌법불합치 판정을 받았다가 98년 12월 폐지됐다.

    문 전 수석은 얼마 전 한 인터뷰에서, “헌법재판소에서 재판을 하는 사람이 땅을 갖고 있기 때문에 위헌 판정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국토개발연구원 토지실장이었던 이태일 충북발전연구원장은 “취지나 순수성은 좋았지만 당위성에 급급해 신중함이 부족한 측면이 있었다”고 말했다. 89년 당시 경실련 정책연구회 멤버였던 최광 전 국회예산정책처장은 “시장원리를 거슬러 논리보다 국민 정서에 의존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되풀이된 정책실패= ‘실패한 정책’ 토지공개념이 정치권에 의해 16년 만에 재현됐다. 89년 당시 토지공개념 추진에 참여했던 주택산업연구원 장성수 박사는 “지금의 토지공개념 논란은 실체가 뭔지도 모를 만큼 충분한 검토 없이 불쑥 튀어 나온 것”이라며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하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결국 여당은 당초 입장을 후퇴해 기반시설부담금제를 조기 실시하는 선에서 논란을 종결시키려 하고 있다. 16년전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겐 예견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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