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 메뉴 건너뛰기 (컨텐츠영역으로 바로 이동)

한해 26만명 응시 `공인중개사 열병`

    입력 : 2003.10.05 17:23 | 수정 : 2003.10.05 17:28

    오후강좌 90% 직장인 "잘릴경우 대비할 겸"
    중개업소 마구 들어서 창업도 폐업도 순식간

    손쉽게 창업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에 해마다 공인중개사 자격시험에 10만~20만명의 응시생이 구름처럼 몰려들고 있다. 하지만 중개업소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문닫는 업소가 속출하는 등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사진은 서울 압구정동 일대에 밀집한 부동산 중개업소. (김창종기자 cjkim@chosun.com)
    공기업에 근무하다 명예퇴직했던 강성모(가명·53)씨는 중개업에 뛰어들었다가 2년 만에 퇴직금 2억원을 고스란히 날렸다. 그는 지난 2001년 5월 용인 수지에서 권리금 5000만원을 주고 개업했다가 문을 닫은 뒤, 작년 1월과 9월 중랑구 신내동과 노원구 상계동에서 다시 창업했지만 실패하고, 올 3월 완전히 중개업계를 떠난 뒤 실직자 신세로 돌아왔다. 그는 “성실하게 했지만, 경쟁을 이겨내기가 어려웠다”면서 “차라리 그냥 놀았던 것만도 못했다”고 후회했다.

    경기침체가 지속되면서 자격증만 있으면 누구나 손쉽게 창업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에 공인중개사 취득 열풍이 불고 있다. 지난 달 치러진 제14회 공인중개사 시험에만 무려 26만여명이 응시하는 등 중개사 자격증이 노후대비 수단으로 각광받고 있다. 하지만 중개업소 난립으로 과당경쟁이 벌어져 폐업하는 곳이 속출, 노후대비는 고사하고 퇴직금만 날리는 사례도 적지 않다.

    ◆ 중개업자 난립으로 폐업 속출 =“작년 이맘때는 자고 나면 건물마다 중개업소 간판이 2~3개씩 새로 내걸렸어요. 그런데 요즘엔 간판만 걸려 있을 뿐 비어 있는 점포가 대부분이에요.” 최근 화성시 태안읍에서 만난 태안랜드부동산 윤정호 사장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병점네거리에서 기산리로 이어지는 343번 지방도로변 상가 건물 1층은 거의 대부분 중개업소가 점령했다.

    현재 이곳에 들어선 중개업소는 줄잡아 150여곳. 작년 가을부터 동탄신도시 분양 특수(特需)를 겨냥한 외지인의 창업이 봇물을 이루며 불과 1년새 80여곳에서 2배 가까이 늘어났다. 하지만 정부의 잇단 투기대책으로 부동산 시장이 싸늘하게 식으면서 업소들의 매출도 연초보다 50~70%씩 줄었고, 문을 닫는 업소들이 줄을 이었다. 윤 사장은 “권리금 없이 매물로 나온 중개업소가 널려 있다”면서 “자격증을 따서 창업한 지 1년도 안 된 ‘초짜’들은 장사가 안 돼 빚만 진 채 떠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부동산 경기호황으로 부동산 중개업소는 매년 10%씩 증가하고 있다. 전국부동산중개업협회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신규 등록한 중개업소는 2001년 말 4만9680곳에서 올 8월말 6만4974곳까지 늘었다. 특히, 서울·경기 등 수도권에 전체의 60%인 4만여곳이 몰려 있다. 수도권의 대단지 아파트에는 적게는 20~30곳, 많게는 100곳 이상의 업소가 난립해 있고, 용인·화성 등 신흥 개발지에는 1년새 2~3배씩 늘어나고 있다.





    ◆ 과당경쟁으로 부작용도 많아 =중개업소의 급증은 결국 과당 경쟁을 촉발시켜 각종 부작용을 낳고 있다. 전국부동산중개업협회 임일환 송파지회장은 “선진국은 500가구당 1개꼴인 중개업소가 국내에서는 150가구당 1개꼴로 들어서 있다”면서 “결국 과당경쟁으로 경쟁력 없는 업소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특히, 실업탈출 수단으로 중개업소 창업에 나섰다가 실패하는 실직자들도 적지 않다. 대한공인중개사협회 김학환 연수원장은 “자격증을 따서 창업했던 40~50대 실직자들이 또다시 실업자로 전락하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RE멤버스 고종완 대표도 “창업자 가운데 10% 정도만 성공하고, 절반은 임대료 내고 생계비 버는 정도에 그치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서울 강남권에서 중개업소를 내려면, 5~6평 규모 점포의 권리금만 1억여원에 달한다. 여기에 월 임대료 150만~200만원, 중개보조원 임금과 통신비, 광고비 등을 포함해 최소 월 500만~600만원의 운영비가 필요하다. 연 매출 1억원을 올려도 한 달 순수입은 200만~300만원에 불과한 셈이다.



    ◆ 중개사 시험, ‘묻지마 응시’ 열풍 =사정이 이런데도 공인중개사 응시자들은 해마다 급증하고 있다. 건설교통부에 따르면 원서 접수기준으로 응시생 규모는 1회(19만8808명)를 빼면 매년 3만~9만명 수준이었다. 하지만 IMF가 터진 97년에 처음으로 10만명을 넘어선 뒤 지난해와 올해는 26만여명으로 급증했다.

    이에 따라 실직자는 물론이고 주부와 직장인, 공무원, 대학생 등 전 국민이 시험대열에 뛰어들고 있다. 서울 종로의 P고시학원 김두하 국장은 “최근 끝난 중개사 시험강좌에만 무려 1000여명이 수강했다”며 “수강생 가운데 절반은 주부들이고, 오후반의 경우는 90%가 직장인”이라고 말했다. 수강생 중에는 은행지점장, 4~5급 공무원은 물론이고 오토바이 택배기사와 노점상까지 있었다. 이 학원에 다녔던 은행원 박모(39)씨는 “퇴직 후를 대비한 일종의 ‘보험’으로 생각하고 시험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산업인력공단에 따르면 올해 응시생(26만1153명) 가운데 무직자는 3만7402명으로 전체의 14%에 불과한 반면, 직장인 응시율은 34%에 달한다. 이 가운데 공무원과 은행원도 각각 5.5%와 4%나 된다. 응시생 연령도 20대(5만5667명)와 30대(10만315명)가 전체의 절반을 차지하면서 갈수록 젊어지고 있다.

    이전 기사 다음 기사
    sns 공유하기 기사 목록 맨 위로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