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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레터]달콤 쌉싸름 한 영화기자

  • 한현우

    입력 : 2000.04.01 14:56

    달콤 쌉싸름 한 영화기자


    안녕하세요. 한현우 입니다.

    아쉽지만 저는 이 메일을 끝으로 시네마레터 회원 여러분과 작별을
    고하게 됐습니다. 벌써 그랬어야 했는데 늦어졌습니다.

    저는 1년 9개월간 주간조선 파견근무를 마치고 지난 3월 5일
    조선일보 문화부로 돌아왔습니다. 제가 회원 여러분께 안녕을
    고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주간조선에서는 ‘쌈마이’이긴 하지만
    영화 담당기자였기 때문에 여기 글을 올릴 최소한 명분이
    있었습니다. 지금 문화부에서는 방송담당기자입니다. 시네마레터에
    방송 담당이 글쓴다는 건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네요.

    이동진 씨와 함께 영화를 맡고자 하는 꿈이 없었던 건 아닌데,
    함량미달 내공부족 족탈불급 언감생심,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하여튼 지금 저는 이동진 씨 앞자리에 앉아 일하는 것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이동진 씨가 해외출장 간 틈에 ‘인간 이동진론’으로 여러분을 처음
    만났고, ‘극장에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 ‘동네극장에 얽힌 추억’
    그렇게 세 꼭지에다 이 글까지, 네 꼭지를 써서 올리고 레터를
    떠납니다. 제 글을 좋아하신 분들이 계셨기 때문에 ‘항상 재미있는
    글을 쓸 수 있을까’하고 내심 걱정했었는데, 이런 식으로도
    풀리는구나 하는 생각도 드네요.

    어찌됐든 여러분들께 드리는 마지막 글이라고 생각하니 고민이
    많이 됐습니다. (잘 아시겠지만)저는 영화에 대한 심미안이 특출한
    것도 아니고, 지식도 없으며 그리 많은 영화를 보지도 못했습니다.
    제가 아는 척 영화에 대해 뭘 쓸 게 없는 셈이죠. 그러다가 생각난
    게, 1년 9개월간 주간조선에서 ‘영화담당기자’로 일한 기억입니다.
    오늘 제 글 주제는 ‘달콤 쌉싸름 한 영화기자’입니다. 물론 저는
    알폰소 아라우 감독 멕시코영화 ‘달콤 쌉싸름 한 초컬릿’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냥 그런 제목을 붙여보았습니다.

    ◆달콤한 영화기자

    제가 주간조선에서 대중문화를 맡았을 때 영화는
    무주공산(무주공산)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접수’했지요. 그때
    생각은 단순했습니다. “시간 나는 대로 시사회 다니고, 그것도 보고
    싶은 영화만 보고, 기사도 쓰고 싶은 영화만 골라 쓰니 얼마나
    좋은가.” 생각은 적중했습니다. 사실 좋은 영화를 보고 감상문을 쓸
    때처럼 벅차기도 힘들지만, 쓰레기 같은 영화는 2시간동안 보기도
    괴롭고 기사를 쓰는 일도 고역이거든요.

    시사회에서 누구보다 먼저 영화를 보는 일은 정말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저의 경우 단순하게도 이런 대화에 가장 큰 매력을
    느꼈습니다.

    친구:“씬 레드라인 이란 영화 개봉한다더라.”
    저:“난 벌써 봤지.”
    친구:“어떻게?”
    저:“시사회에서.”
    친구:“좋겠다.”

    못난이 형제의 대화장면을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저는
    그게 가장 큰 기쁨이었습니다. 남들보다 먼저 그 영화를 본다는 그
    기쁨. 영화를 보고 나서 신문에 난 ‘개봉박두’ 광고를 볼 때의 그
    묘한 쾌감. 저는 변태인가 봅니다.

    사실 제 친구들이나 아는 사람 가운데 돈 없어서 영화 못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들 시간이 없어서 못 보는 것이지요. 그런데
    저는 멀쩡한 근무시간에,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은 시사회장에서,
    그것도 개봉하기도 전에, 게다가 공짜로 보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영화계 사람들을 만나는 일도 아주 즐거운 일이었지요. 본격
    영화기자에 비해서는 정말 몇 명 만나보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기억에 남는 분을 잠깐 열거해볼까요.

    먼저 시네마서비스 강우석 감독을 꼽을 수 있습니다. 분명히
    저녁식사 자리에 초대해놓고는 저를 보자마자 “어, 저 친구 또 왔네”
    하는 그 특유의 입담, 취하기 전이나 후에나 변함없는 그 자신감이
    부러웠습니다.

    강 감독 덕분에 만난 장윤현 감독과 구본한 대표도 잊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은 성을 따서 ‘쿠앤씨 필름’을 만들어
    공동대표로 있다가 최근 ‘쿠앤 필름(구본한)’과 ‘씨앤
    필름(장윤현)’으로 나뉘었지요.

    특히 장 감독은 저와 동갑내기로, 술에 취해서는 “야, 이제 우리 말
    놓자” 해놓고 그 다음 시사회에서 만나면 “저번에 잘
    들어가셨어요?” 하고 다시 말을 높이고, 또 술 마시면 “이제 우리 말
    놓을 때 안됐냐?”하던 인간 사오정들이었습니다. 사실 오늘 장
    감독을 만난다 해도 말 놓기가 쉽지 않을 것 같네요.

    구본한-장윤현 두 사람이 ‘쿠앤씨’라면, 영화 홍보계에는 ‘쿠앤신’이
    있습니다. 바로 콜럼비아 영화사의 구창모 부장(가수 구창모와
    상관없습니다)과 CJ엔터테인먼트의 신승근 팀장이지요. 두 분도
    ‘쿠앤씨’만큼이나 친한 분으로, 특히 1000원 내기 3쿠션 당구게임과
    폭탄주에 능한 분들입니다.

    저희 신문에 ‘심자매의 충무로 이야기’를 연재하고 계신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와 심보경 실장, 영화홍보사 ‘올댓 시네마’의 채윤희
    대표, 영화사 ‘좋은 영화’의 김미희 대표는 제가 만난 훌륭한
    영화인들이었습니다. 이 분들은 모두 여자 분 이신데,
    ‘여성영화인’이라고 하지 않는 것은 그렇게 해서 남성영화인들과
    비교하는 것조차 멍청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참, 그리고
    영화홍보사들 가운데 유일하게 이동진 씨 보다 저를 더 좋아해 주신
    올댓시네마 모든 분들께도 특별히 감사드려야겠습니다.

    글을 쓰다 보니 제가 무슨 수상소감이라도 말하고 있는 느낌이네요.
    하여튼 영화담당기자는 영화팬들보다 먼저 영화를 보고, 영화 뿐
    아니라 그 뒷이야기까지 들어 알 수 있는 직업이더군요. 영화라는
    단어만 들어도 가슴 설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푹 빠져볼 만한
    직업이 아닌가 합니다. 저는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만...

    외국 영화제는 가보지 못했지만 작년 부산영화제 취재는 정말
    흥겨운 경험이었습니다. 그 열기 속에서 이리 저리 영화 보러
    뛰어다닌 기억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이건 꼭 기자만 할 수 있는
    경험은 아닐테니, 여러분도 한번쯤 시간을 내서 가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쌉싸름한 영화기자

    어느 날 한 스페인영화가 들어온다는 소식을 ‘씨네21’을 통해
    알았습니다.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시사회 소식이 없더군요.
    그래서 알아보니 벌써 시사회를 했답니다. 왜 나한테는 연락이
    없었을까 하고 영화홍보사에 전화를 했습니다. 그쪽에서는
    “신입사원을 시켜서 시사회 안내 팩스를 넣으라 했는데 깜빡한
    모양이다” “연락처를 모두 정리하다가 빠뜨린 모양이다”
    횡설수설했습니다. “다음부터는 꼭 연락 달라”고 부탁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홍보사는 스페인 영화를 포함해 그 며칠 새
    무려 영화 4편의 시사회를 저에게 알리지 않았더군요. 인간적인
    모멸감이 들었습니다. 시사주간지 영화면이 일간지 영화면 보다
    ‘영향력’이 떨어지는 건 사실일테지만, 전화 연락 한번 못할
    만큼일까 하는 생각이 든 거죠.

    영화기자라는 직업, 매체 영향력에 따라 차별이 무척 심하더란 게 제
    소감입니다. 중앙일간지 사이에서는 별로 그런 점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제가 시사주간지에 있어보니까 그렇더군요.

    예를 들어 어떤 영화배급사의 경우, 보도자료와 사진조차 차별해서
    줍니다. 막무가내로 달라고 하면 그제서야 보도자료만 간신히
    주는데, 보도자료를 넣을 봉투를 주지 않습니다. 정말 치사하고
    더럽기 짝이 없지요. 그럴 때 자존심 구기고 “봉투 하나만…” 하고
    말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겁니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매체 기자만 따로 살짝
    부릅니다. 외국에서 공수해온 슬라이드를 늘어놓고 “마음대로
    고르라”고 하지요. 물론 보도자료와 슬라이드를 손수 봉투에 넣어
    주면서 말입니다. 이럴 때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는
    항의 한 마디 안 했습니다. 너무 상심하면 할 말을 잃는 법입니다.
    상대를 안 하는 게 오히려 낫다는 것이지요.

    지금도 수많은 영화 관련 웹진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영화를
    수입-배급-홍보하는 회사 도움을 받지 않고는 일을 진행할 수가
    없겠지요. 영화기자란 직업은 항상 달콤하기만 한 건 아니더군요.

    그런데 유력 매체일수록 그런 식의 ‘대접’도 받지만 엉뚱하게도
    협박을 받기도 한답니다. 엉망인 영화를 “엉망이다”라고 썼다가 “니
    인생 한번 엉망 돼볼래?” 하는 전화를 받는 일도 있다네요. 저희
    회사에도 한 영화사 직원이 와서 이른바 ‘깽판’을 놓은 적도
    있습니다. 이쯤 되면 독자를 가장 무서워해야 할 영화기자들이
    주먹과 칼을 무서워할 수도 있겠지요. ‘독자는 멀고 칼은
    가깝다’라고나 할까요.

    이제 길고 지루한 제 글을 접어야겠습니다. 항상 그랬지만 이 레터를
    끝낼 때면 더 쓸 말이 많은데, 하고 후회가 먼저 듭니다. 하고 싶은
    말을 조리 있게 정리하지 못하는 저의 필력을 탓할 따름입니다.

    제가 회원 여러분들로부터 받은 메일 중에 가장 인상적인 메일은
    “조선일보 기자들은 뿔 달린 사람들인줄 알았더니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아서 반가웠다”는 메일이었습니다. 그 한 문장으로는
    전혀 해석할 수 없는 이 글이 뭘 의미하는지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대학 다닐 때 비슷한 생각을 했었구요. 그런 독자들로부터 격려
    한 마디 듣는 그 보람, 그 즐거움에 신문쟁이하며 삽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십시오.

    <*한현우기자 hwh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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