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1999.04.25 17:59
###### 군민합작론 #####.
1963년3월20일 야당 지도자 허정(전 과도정부 수반)이 기자
들에게 "군정 연장은 군 일부에서 그렇게 작정한 것이지 군 전체
의 의사는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한 것이 석간에 보도되었
다. 최고회의는 발끈했다. 대책회의 끝에 군의 단결을 과시하기
로했다. 3월22일 오전 전군 지휘관 회의가 국방부에서 열렸다.김
성은 국방부 장관과 160여명의 지휘관들은 '우리 군은 박정희 의
장의 3·16 군정 연장안을 지지하며 군의 단결을 해치는 어떤 언
동도 이를 용납하지 않을것이다'는 요지의 결의문을채택했다. 회
의를 마친 군 지휘관들은 김장관을 선두로 97대의 지프차에 분승
하여 청와대까지 일종의 차량시위를 벌였다.
사진설명 :
군을 박정희 지지로 끌고 가는데 앞장선 김성은 국방장관.
그 시간 중구 서린동 백조 그릴에서는 윤보선, 김병로, 박순
천, 변영태 등 재야 중진과 4백여 명의 정치인들이 '김인오 군과
박숙자 양의 약혼식'이란 위장 팻말을 걸고는 '민주구국전선'을
결성하는 대회를 열고 있었다. 이들은 대회를 마치고 가두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에 의하여 해산되었다.
1963년 3월23일자 뉴욕 타임스는 '한국의 정치적 위기는 한
국과 미국이란 두 계층의 관객을 위하여 벌이는 일종의 연극과같
은 것이다'고 꼬집었다.
3월30일부터 4월1일까지 연3일간 청와대에서는 박정희, 윤보
선, 허정 세사람이 군정연장안에 대한 담판을 벌였다. 아무런 진
전이 없다가 마지막 날에 '조야 실무자회의'를 갖기로 합의했다.
4월1일 박의장은 자신을 찾아온 민정당 청년당원 대표들에게
격한 말을 했다.
"기성 정객들이 반성하고 새 세대들이 정권을 인수할 준비가
되기 전에는 3·16성명을 지킬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
"2·27선언을 통해서 내가 민정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은 정권을 기성정치인들에게 넘겨주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오
히려 그들에게 반성의 기회를 주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정치인
들은 정권을 잡을 기회가 온듯 오해를 하고 야단들이다.".
"3·16성명 후 미국이 혁명정부를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한
것을 두고 재야 정치인들이 두 손을 들고 환영한다고 나선 것은
기회주의이고 사대주의이다. 우리가 자주성을 상실했음을 잘 보
여주는 일이다.".
강기천 등 최고회의측 실무회의 대표와 조재천(민주당 시절
법무장관)등 재야 대표들은 4일간 회의를 열고 절충안을 검토했
다. 그 내용은 '군정연장안을 국민투표에 붙이기로 한 3·16선언
을 박의장이 철회한다면 군정을 오는 12월 31일까지 연장하는 데
동의한다'는 요지였다. 정구영 공화당 총재와 재야의 윤보선, 허
정세 사람은 서로 막후 접촉을 통해서 실무협상을 엄호하고 있었
다. 이 세 정치지도자는 '2·28민정불참 선언'과 '3·16군정연장
안'을 상쇄시켜 털어버리고 민정이양 기한을 8월15일에서 연말로
연기함으로써 시간을 벌자는 데 합의했다.
박정희의장은 이 절충안을 놓고서 최고회의내의 온건파인 유
양수(뒤에 동자부 장관), 박태준(뒤에 포철 회장), 유병현(뒤에
합참의장), 그리고 김재춘 정보부장을 불렀다. 온건파 위원들은
이 자리에서 공화당과는 별도로 민간정치인들도 참여시키는 군민
합작의 참신한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박정희
도 검토를 지시했다. 그 며칠 뒤 한남동에 있는 정보부의 안전가
옥에서 준비모임이 열렸다.
최고회의측에서 온건파 네 위원, 공화당에서 박준규(현 국회
의장), 김재순(전 국회의장), 야당인 민정당에서 김용성, 이상신
이 초청을 받아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도 범국민적인 기반을
가진 군민연합의 참신한 정치세력을 구성하자는 의견이 모였다.
박정희 의장은 이 모임의 결과를 보고받고는 최고회의내에 정
책소위원회를 구성하여 범국민정당 조직문제를 협의토록 했다.위
원장에는 유양수, 위원으로는 박의장의 민정 참여를 주장해온 친
김종필(즉 친공화당) 계열의 길재호, 홍종철을 포함하여 박태준,
유병현 등으로 구성되었고 김재춘 부장이 이를 지원하게 되었다.
박정희가 군정연장안을 밀어붙일 때는 '국민투표만 하면 자
신 있다'는 낙관론이 깔려 있었다. 여기에 반론을 제기한것이 정
구영 공화당 총재였다. 그는 박정희가 군정연장안을 발표한 직후
공관으로 박의장을 방문했다.
"어쩌자고 군정연장을 하겠다고 하십니까."
"군인들이 난동을 하고 이것이 큰 변란으로 발전할 우려가 있
소. 혁명 주체들이 매일 같이 나를 찾아와 울고불고 책상을 두드
리고…. 남 좋은 일 시키려고 혁명했느냐, 그러면서 날뛰고 그러
는데 이렇게라도 해서 군인들을 가라앉혀야지요. 잘못된 일인 줄
알면서도 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국민투표를 하면 통과될 것 같습니까? 지난 번에 헌법안이
국민투표에서 통과된것은 민정이양을 하겠다고 하니까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번엔 어림 없습니다.".
다음날 박정희는 정구영 총재와 김재춘 부장을 함께 불러 국
민투표 문제를 놓고 이야기했다. 김재춘은 국민투표에 자신이 있
다고 하고 정구영은 비관론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종했다. 정구
영은 공화당이 군정연장안을 지지하는 성명을 내달라는 주체세력
의 부탁도 거절했다. 박정희로서는 대단히 섭섭한 일이었다. 이
즈음부터 박정희의 마음속에는 공화당은 자신의당이 아니고 산파
인 김종필의 당이란 생각이 싹트고 있었던 것 같다. 공화당 사전
조직 때 박 의장은 딱 한번 비밀 교육장을 찾은 적이 있을 뿐이
다. 그 방문도 한 시간을 넘지 못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