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1998.10.20 19:05
`8기' 주축 중정창설 .
## `8기' 주축 중정창설 ##.
5월16일 밤 김종필은 중앙정보부를 조직하는 데 협조해달라고 불러낸
육사 8기 동기생 최영택(전 주일공사) 중령과 함께 혁명군 완장을 만들
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울 명동 입구의 상패 만드는 집으로 갔다. 가게
주인은 낚시와 등산용 지도를 만들어 팔기도 하는 사람인데 김종필한테
신세를 진 적이 있었다. 김종필이 육본 정보국 기획과장으로 있을 때 이
주인이 5만분의 1 군사지도를 등산용으로 팔려고 허락을 부탁해왔다.
사진설명 :
장면총리 직속의 중앙정보위원회 실장이던 이후락은 혁명정부에게 업무일체를
선선히 넘겨 주었다.
김종필이 상부에 이야기해서 좌표를 지우고 판매하도록 해주는 바람
에 많은 돈을 벌었던 사람이었다. 이 주인은 그날 밤을 새워 수천 장의
완장을 만들어주었다. 17일부터 하얀 천에 혁명군이라 쓴 완장을 나누어
주니 군인들의 사기가 충천하는 것이었다. 혁명군이 아닌 군인들은 완장
을 찬 동료들을 보고 부러워했다. 최영택은 완장의 심리적 효과에 놀랐
고 이를 적절하게 이용한 김종필의 두뇌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17일 오후 김종필은 최영택에게 "우리 동기들을 불러오자. 우선 서정
순, 이영근, 그리고 제대한 뒤 대구에 내려가 있는 고제훈을 불러와"라
고 했다. 이들이 정동 구러시아 공사관 근처의 하남호텔에 모인 것은 5
월 18일이었다. 김종필이 대강 정해준 지침에 따라 이들은 중앙정보부의
조직안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6·25 전부터 육본정보국에서 근무한
장교들로서 당시 전투정보과 비공식 문관이던 박정희와 친면이 있었다.
이들은 작업을 하다가 석정선을 생각했다. 동기생 석정선은 4·19 직
후 김종필과 함께 군내 정화운동을 주동했던 인물이었다. 김, 석 두중령
은 둘도 없는 친구로서 5·16 석달 전에 헌병대에 같이 구속되었다가 강
제 예편당할 때까지는 행동을 함께 했다. 그 뒤 석정선은 "나는 처자식
도 있고 하니 혁명은 그만두겠다"고 하여 손을 뗐었다. 김종필은 "좋다.
네 갈 길을 가라. 그러나 혁명이 누설되면 네가 한 걸로 알겠다"고 엄포
를 놓았다. 동기생들은 뛰어난 정보장교인 석정선의 머리가 필요하니 그
를 불러야겠다고 김종필에게 건의했고 김종필도 양해했다. 석정선이 참
여하자 하남호텔의 모임은 활기를 더해갔다. 이들은 중앙정보부뿐 아니
라 군사혁명위원회를 이을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조직안도 만들었다. 이들
은 혁명정부 권력구조의 산파이기도 했다.
19일 김종필은 최영택 중령에게 장면 총리 직속으로 되어 있던 중앙
정보위원회의 이후락 실장으로부터 업무 일체를 인수하라는 지시를 했다.
이후락은 자유당 시절에 김정렬 국방장관으로부터 발탁되어 장관 직속의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이 부대의 이름을 자신의 군번을 따서 79부대로
붙였다. 79부대의 주임무는 미국 CIA와 정보교류를 하는 것이었다. 육군
소장 이후락은 장면 정부시절에도 같은 일을 보고 있었다.
정보위원회는 그러나 경찰, 군의 여러 정보기관을 통합조정하는 국가
정보기관으로서는 기능하지 못하고 있었다.
최영택 중령은 이후락 실장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부인이 전화를 받
는데 "안 계신다"는 것이었다. 최영택은 이후락과 함께 연합참모본부에
서 근무한 적이 있었다. 최영택은 "사실 저는 최영택입니다"라고 하니
부인은 "어머나 그러세요. 잠깐 기다리세요"라고 하더니 이후락을 바꾸
어 주더란 것이다.
"최영택 중령입니다. 이젠 군사혁명이 성공단계로 들어가고 있습니
다. 저희들이 중앙정보부를 창립하려고 하는데 도와주십시오."
"아, 협조하지요.".
"인수인계를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언제든지 좋습니다.".
"일단 내일 한번 뵈면 어떨까요."
"좋지요. 내일 오후 1시에 명동 사보이 호텔 지하 다방에서 만납시다.".
5월20일 최영택은 김종필을 따라가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들에게 '국
가 재건최고회의'의 조직과 기능 등 혁명정부의 통치기구 조직에 대해서
보고했다. 최영택은 차트를 넘기고 김종필이 설명했다. 장도영 총장은
'최고'란 말이 거슬린다고 지적했다. 최연장자인 김홍일 외무장관이 말
했다.
"지금 우리는 군사혁명을 한 것입니다. 이런 시기엔 권위 있는 이름
이 필요합니다. 비록 공산국가에서 쓰고 있다고 해도 '최고'란 단어를
못쓸 이유가 없습니다.".
김동하 해병 소장도 찬동하는 바람에 원안대로 통과되었다. 최고위원
중 한 명인 김포 해병여단장 김윤근 준장은 이날 김종필의 구상이 스케
일이 크고 원대한 비전을 담고 있어 큰 감명을 받았다. 그의 능란한 화
술 때문에 브리핑 내용뿐만 아니라 이 조직안을 만든 사람들을 돋보이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김종필은 이 자리에서 국가재건최고회의 직속으로
중앙정보부와 재건국민운동본부를 둔다는 것도 보고했다. 김윤근은 5월
17일 저녁 육본 상황실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30명 가운데 육사8기생들에게 다섯 명이 배정되었다. 8기생들은 한 구석
에 모여 승강이를 벌이는데 김종필이 나타나 무슨 말을 하니 조용해지는
것이었다. '아 이 사람이 8기생들 중 리더구나'하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최영택은 보고회를 마치고 이후락과의 약속장소인 사보이 호텔로 갔
다. 30분이 늦었는데도 이후락은 기다리고 있었다. 이후락은 선선히 말
했다.
"우리는 사실 그동안 본격적으로 활동하지 못했어요. 현재까지는 미
국 CIA와 정보를 교환하는 일만 했습니다. 다 인계해드리겠습니다. 내일
오후 3시에 우리 사무실에서 만납시다.".
최 중령은 다음날 (5월21일) 남산에 있는 중앙정보위원회 사무실로
갔다. 이후락은 보이지 않고 육군 소장인 차장과 해군 대령인 국장이 업
무인계를 해주려고 했다. 이때 미국 대사관에서 왔다는 두 미국인이 나
타났다.
CIA 요원이라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자신들과 정보교류를 하는 한국
측 창구가 바뀌고 있는 상황에서 궁금해서 나와본 것 같았다. 두 미국인
이 지켜보는 가운데 인수인계 서류에 도장을 찍은 최영택은 현황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중앙정보부 창설 준비작업반은 5월22일엔 하남호텔에서 화신백화점
뒷편에 있는 여관으로 옮겼다. 다음날 김종필이 오더니 돈뭉치를 주고는
말했다.
"그런데 오늘 다른 데로 옮겨야겠어. 민주당 계통 사람들이 이 여관
에 많이 들락거려. 도저히 보안유지가 안되겠어.".
작업반은 서울 퇴계로 입구에 있던 중앙여관으로 다시 이동했다. 국
회의사당으로 최고회의가 입주한 뒤에는 서울신문 옆 국회별관이 중앙정
보부 창설준비 사무실로 쓰였다.
(*조갑제 출판국부국장*)
(*이동욱 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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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16일 밤 김종필은 중앙정보부를 조직하는 데 협조해달라고 불러낸
육사 8기 동기생 최영택(전 주일공사) 중령과 함께 혁명군 완장을 만들
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울 명동 입구의 상패 만드는 집으로 갔다. 가게
주인은 낚시와 등산용 지도를 만들어 팔기도 하는 사람인데 김종필한테
신세를 진 적이 있었다. 김종필이 육본 정보국 기획과장으로 있을 때 이
주인이 5만분의 1 군사지도를 등산용으로 팔려고 허락을 부탁해왔다.
사진설명 :
장면총리 직속의 중앙정보위원회 실장이던 이후락은 혁명정부에게 업무일체를
선선히 넘겨 주었다.
김종필이 상부에 이야기해서 좌표를 지우고 판매하도록 해주는 바람
에 많은 돈을 벌었던 사람이었다. 이 주인은 그날 밤을 새워 수천 장의
완장을 만들어주었다. 17일부터 하얀 천에 혁명군이라 쓴 완장을 나누어
주니 군인들의 사기가 충천하는 것이었다. 혁명군이 아닌 군인들은 완장
을 찬 동료들을 보고 부러워했다. 최영택은 완장의 심리적 효과에 놀랐
고 이를 적절하게 이용한 김종필의 두뇌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17일 오후 김종필은 최영택에게 "우리 동기들을 불러오자. 우선 서정
순, 이영근, 그리고 제대한 뒤 대구에 내려가 있는 고제훈을 불러와"라
고 했다. 이들이 정동 구러시아 공사관 근처의 하남호텔에 모인 것은 5
월 18일이었다. 김종필이 대강 정해준 지침에 따라 이들은 중앙정보부의
조직안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6·25 전부터 육본정보국에서 근무한
장교들로서 당시 전투정보과 비공식 문관이던 박정희와 친면이 있었다.
이들은 작업을 하다가 석정선을 생각했다. 동기생 석정선은 4·19 직
후 김종필과 함께 군내 정화운동을 주동했던 인물이었다. 김, 석 두중령
은 둘도 없는 친구로서 5·16 석달 전에 헌병대에 같이 구속되었다가 강
제 예편당할 때까지는 행동을 함께 했다. 그 뒤 석정선은 "나는 처자식
도 있고 하니 혁명은 그만두겠다"고 하여 손을 뗐었다. 김종필은 "좋다.
네 갈 길을 가라. 그러나 혁명이 누설되면 네가 한 걸로 알겠다"고 엄포
를 놓았다. 동기생들은 뛰어난 정보장교인 석정선의 머리가 필요하니 그
를 불러야겠다고 김종필에게 건의했고 김종필도 양해했다. 석정선이 참
여하자 하남호텔의 모임은 활기를 더해갔다. 이들은 중앙정보부뿐 아니
라 군사혁명위원회를 이을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조직안도 만들었다. 이들
은 혁명정부 권력구조의 산파이기도 했다.
19일 김종필은 최영택 중령에게 장면 총리 직속으로 되어 있던 중앙
정보위원회의 이후락 실장으로부터 업무 일체를 인수하라는 지시를 했다.
이후락은 자유당 시절에 김정렬 국방장관으로부터 발탁되어 장관 직속의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이 부대의 이름을 자신의 군번을 따서 79부대로
붙였다. 79부대의 주임무는 미국 CIA와 정보교류를 하는 것이었다. 육군
소장 이후락은 장면 정부시절에도 같은 일을 보고 있었다.
정보위원회는 그러나 경찰, 군의 여러 정보기관을 통합조정하는 국가
정보기관으로서는 기능하지 못하고 있었다.
최영택 중령은 이후락 실장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부인이 전화를 받
는데 "안 계신다"는 것이었다. 최영택은 이후락과 함께 연합참모본부에
서 근무한 적이 있었다. 최영택은 "사실 저는 최영택입니다"라고 하니
부인은 "어머나 그러세요. 잠깐 기다리세요"라고 하더니 이후락을 바꾸
어 주더란 것이다.
"최영택 중령입니다. 이젠 군사혁명이 성공단계로 들어가고 있습니
다. 저희들이 중앙정보부를 창립하려고 하는데 도와주십시오."
"아, 협조하지요.".
"인수인계를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언제든지 좋습니다.".
"일단 내일 한번 뵈면 어떨까요."
"좋지요. 내일 오후 1시에 명동 사보이 호텔 지하 다방에서 만납시다.".
5월20일 최영택은 김종필을 따라가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들에게 '국
가 재건최고회의'의 조직과 기능 등 혁명정부의 통치기구 조직에 대해서
보고했다. 최영택은 차트를 넘기고 김종필이 설명했다. 장도영 총장은
'최고'란 말이 거슬린다고 지적했다. 최연장자인 김홍일 외무장관이 말
했다.
"지금 우리는 군사혁명을 한 것입니다. 이런 시기엔 권위 있는 이름
이 필요합니다. 비록 공산국가에서 쓰고 있다고 해도 '최고'란 단어를
못쓸 이유가 없습니다.".
김동하 해병 소장도 찬동하는 바람에 원안대로 통과되었다. 최고위원
중 한 명인 김포 해병여단장 김윤근 준장은 이날 김종필의 구상이 스케
일이 크고 원대한 비전을 담고 있어 큰 감명을 받았다. 그의 능란한 화
술 때문에 브리핑 내용뿐만 아니라 이 조직안을 만든 사람들을 돋보이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김종필은 이 자리에서 국가재건최고회의 직속으로
중앙정보부와 재건국민운동본부를 둔다는 것도 보고했다. 김윤근은 5월
17일 저녁 육본 상황실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30명 가운데 육사8기생들에게 다섯 명이 배정되었다. 8기생들은 한 구석
에 모여 승강이를 벌이는데 김종필이 나타나 무슨 말을 하니 조용해지는
것이었다. '아 이 사람이 8기생들 중 리더구나'하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최영택은 보고회를 마치고 이후락과의 약속장소인 사보이 호텔로 갔
다. 30분이 늦었는데도 이후락은 기다리고 있었다. 이후락은 선선히 말
했다.
"우리는 사실 그동안 본격적으로 활동하지 못했어요. 현재까지는 미
국 CIA와 정보를 교환하는 일만 했습니다. 다 인계해드리겠습니다. 내일
오후 3시에 우리 사무실에서 만납시다.".
최 중령은 다음날 (5월21일) 남산에 있는 중앙정보위원회 사무실로
갔다. 이후락은 보이지 않고 육군 소장인 차장과 해군 대령인 국장이 업
무인계를 해주려고 했다. 이때 미국 대사관에서 왔다는 두 미국인이 나
타났다.
CIA 요원이라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자신들과 정보교류를 하는 한국
측 창구가 바뀌고 있는 상황에서 궁금해서 나와본 것 같았다. 두 미국인
이 지켜보는 가운데 인수인계 서류에 도장을 찍은 최영택은 현황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중앙정보부 창설 준비작업반은 5월22일엔 하남호텔에서 화신백화점
뒷편에 있는 여관으로 옮겼다. 다음날 김종필이 오더니 돈뭉치를 주고는
말했다.
"그런데 오늘 다른 데로 옮겨야겠어. 민주당 계통 사람들이 이 여관
에 많이 들락거려. 도저히 보안유지가 안되겠어.".
작업반은 서울 퇴계로 입구에 있던 중앙여관으로 다시 이동했다. 국
회의사당으로 최고회의가 입주한 뒤에는 서울신문 옆 국회별관이 중앙정
보부 창설준비 사무실로 쓰였다.
(*조갑제 출판국부국장*)
(*이동욱 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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