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1998.09.08 18:56
## 김포가도 ##.
5월16일 새벽2시 직전 박정희는 6관구사령부를 나와서 한웅진
준장과 함께 지프에 올랐다. 이석제의 지프엔 이형주, 박순권 중
령이 타고 박정희가 탄 앞차를 뒤쫓았다.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김포로 달리는 차중에서 앞자리의 박정희는 뒷자리의 한웅진 육
군정보학교장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10년 전에 타계한 한웅진
준장이 기자에게 남긴 증언에 따르면 이날 차중 대화는 대강 이
러했다고 한다.
·박정희:"지방에서는 지금 서울 상황을 모르고 있을 거야.빨
리 부대가 출동해야 하는데 말이야. 새벽 5시에 라디오를 들으라
고 해놓았는데 방송이 나가지 않으면 호응하기로 한 부대에서는
자살하는 사람도 있을지 몰라."
·한웅진:"실패하면 빌어먹을 산속에라도 들어가서 협상이라도
벌입시다.".
·박정희:"병력이 나와야 협상이라도 하지. 라오스의 콩레 대
위처럼 그렇게 하는 것이 부하도 살리고 다 사는 길이 될지 모르
지."
·한웅진:"형님, 어쨌든 우리는 성공할 겁니다. 아무리 나라
를 위해 거사했다 하더라도 실패하면 만고역적이 되니까 끝까지
해봅시다.".
박정희와 한웅진은 차중에서 담배를 계속 태웠다. 담배연기만
이 두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켜 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이날 차
중에서 여섯 갑을 태웠다는 것이다. 박정희도 이 순간에는 초조
했던지 라이터를 쥐고 있으면서 한웅진을 보고는 라이터를 달라
고 재촉하기도 했다고 한다. 한웅진은, 그 12년 전 박정희가 군
내의 남로당 조직원으로서 체포되어 전기고문까지 당하고 무기징
역 선고까지 받았다가 군복을 벗고나서 불우한 삶을 살아가고 있
을 때 육본 특무과장이었다. 한웅진은 육사2기 동기이지만 나이
가 많은 박정희를 형님처럼 모시면서 인생의 나락에 떨어진 그를
가장 가깝게 지켜보았던 이였다. 이제 그는 또 한번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박정희의 동반자가 된 것이다.
한편 공수단의 출동부대 지휘자인 김제민 대대장은 6관구에서
보내주기로 한 트럭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차량대는 예정시간보
다 한 시간쯤 늦은 밤11시에 도착했다. 김 중령은 10대의 트럭을
몰고온 운전병을 공수단 요원으로 바꾸었다. 6관구 운전병들은
부대안에 격리되었다. 김제민은 대대 연병장 옆에 있는 공수교육
장에 트럭을 세워놓고 요인체포 임무를 맡은 장교들이 나타나기
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 장교는 공수단이 서울로 들어간 이후
한 팀씩 지휘하여 총리, 장관들을 체포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총리 체포를 책임진 박종규 소령만 심야에 나타났다.
한 주체장교 출신 인사는 "그날 밤 거사가 탄로났다는 사실이 알
려진 뒤 피신하여 밤을 보낸 뒤 다음날 아침에 상황이 호전되자
나타난 사람들도 더러 있다"고 했다.
김제민 중령은 차량이 도착한 뒤에도 박치옥 단장이 출동명령
을 내리지 않아 단본부로 전화를 걸었다. 대대본부와 단본부는
약 2㎞나 떨어져 있어 서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
다.
"단장님, 출동준비 다 되었습니다."
"어, 그래 잠시 기다려봐.".
김제민 대대장은 일단 부대원들을 트럭에 태웠다. 포섭된 팀
장들을 제외한 일반 병사들은 폭동 진압훈련인 줄 알고 있었다.
김제민 대대장은 출동시간이 지났는데도 명령이 떨어지지 않
아 초조했었다고 한다. 이 무렵 공수단 정문에 박정희가 도착했
다. 박치옥은 최근 증언에서 박정희가 도착했을 때는 공수단이
출동준비를 끝내고 정문으로 나서려는 시점이었다고 한다. 뒤차
로 따라온 이석제가 보니 박정희는 박치옥을 정문으로 불러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 이석제는 차에서 내려 카
빈총을 정문쪽으로 겨누고 있었다고 한다. 박정희는 박치옥에게
"빨리 출동하라"고 독려했다는 것이고 박치옥은 "왜 안내 장교들
이 오지 않았습니까. 왜 차량을 늦게 보냈습니까"하고 따졌다고
한다. 정문에서 대화를 나누고 지프쪽으로 돌아온 박정희의 표정
은 그리 밝지 않았다고 한다. 박치옥에 따르면 이때 박정희의 입
에선 술냄새가 났고 자포자기한 마음을 술기운으로 버티는 것 같
았다고 한다. 이석제는 이런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박정희는 지프에 몸을 실으면서 "해병대로 가자"고 했다. 이
석제의 지프는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박정희는 "당신들은 여기
서 기다리시오"라고 말한 뒤 떠났다. 김포 해병여단으로 달리는
차중에서 박정희는 뒷 자리에 탄 한웅진 준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고 한다.
"해병대가 이 길을 진격하고 있을 때인데 도로가 캄캄하기만
하니 이상하지 않소. 해병대도 출동하지 않고 있다면 다른 부대
는 예정대로 출동했다고 거짓말을 해서라도 끌고 나와야겠는 걸.".
지프가 길가의 경찰서 지서에 도착했다. 박정희는 내려서 지
서로 들어갔다. "해병대가 이 앞을 통과했느냐"고 물었으나 그런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지서에 나와 있던 해병대 헌병에게 여단
본부로 전화를 해보도록 했다.
"이미 30분 전에 부대를 떠났다고 합니다.".
박정희는 '도대체 어느 길로 갔기에 보이지 않는가'고 생각하
면서 지프를 한 1㎞쯤 더 달리게 했다. 맞은 편에서 해병대 지프
가 달려오고 있었다.
박정희는 그 지프를 세우고 물어보았다. 지프에 타고 있던 해
병 헌병장교는 "우리 부대는 질러 가는 길로 갔을 것이다"고 답
했다. 박정희는 차를 돌려 공수단쪽으로 몰게 했다. 박정희 소장
은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석제 일행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고 한다.
"해병대를 만나면 30, 33사단의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이 좋
지 않겠나. 해병대측으로서는 육군이 출동한 것으로 알고 있을
거야. 그러니 동지 한 사람이 배반하여 기밀이 누설되었으므로
출동이 약간 늦어져 부득이 해병대가 앞장서게 되었다는 정도로
암시만 주도록 합시다. 상세한 이야기는 사기를 저상시킬 우려가
있으니 하지 말아요.". (계속).
(* 조갑제 출판국부국장 *)
(* 이동욱 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