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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생애] 제8부 격랑속으로-⑥ 마부사태....<213>

      입력 : 1998.06.19 19:26






      ## 3·15 규탄 거세지자 `이박사 납치안'도 ##.

      3·15투표일이 임박하자 군내 부정선거를 지휘하던 방첩대 본부에서
      군수기지사령부로 회식비를 내려보냈다. 작전참모 김경옥 대령이 그 돈
      을 수령해서 박정희에게 주었더니 "몽땅 돌려주라"고 하는 것이었다.할
      수 없이 김경옥은 돈을 부산지구 방첩대장에게 갖다주고는 "너희가 쓰
      고 보고할 때는 우리가 썼다고 하라"고 했다.


      사진설명 :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 부산일보 마산주재 허종 기자가 찍은 김주열 군 시신
      사진은 민심을 크게 자극했다.




      투표 며칠 전 송요찬 육군 참모총장이 부산에 왔다. 송 총장은 출입
      기자들을 시내 중앙동 일식당으로 초대했다. 기자들이 '박 사령관은 근
      래 기자들과 접촉이 없다'고 불평했다.

      "거, 잘 봐주시오. 그러니 오늘 이렇게 모인 게 아니겠소. 앞으로
      중대사도 있는데. 어디 박 장군도 바빠서 그렇지 기자 선생님들을 싫어
      해서 그랬겠소?".

      이 자리에 있었던 부산일보 김종신 기자는 1966년에 '이 말을 듣고
      있던 박 장군이 "X 같은 새끼!"라고 내뱉었다'고 '령시의 횃불'에서 썼
      다. 이 책을 읽은 박 대통령은 당시 청와대 출입기자 김종신을 부르더
      니 "내가 송 장군에게 그런 욕을 한 기억은 없어요"라고 했다. 김종신
      은 "맞습니다. 제가 실감을 주기 위해서 좀 과장을 했습니다"라고 했다.
      박정희가 덧붙였다.

      "그 말 지우면 책이 안팔리나."
      "역시 그런 대목이 있어야 박력이 풍기고 판매에도 도움이 됩니다."
      "많이 팔린다면 할 수 없지.".

      당시 문제의 술자리에 참석했던 국제신보 설영우 기자는 '송요찬이
      이번 선거에 협조해달라는 당부를 하자 박정희가 여러 기자들 앞에서
      정색을 하고 "그럴 수는 없습니다"라고 반박하여 분위기가 어색해졌는
      데 송요찬은 그런 박정희 사령관을 상당히 어렵게 여기는 것 같았다'고
      기억하고 있다. 송요찬 총장과 방첩대가 주도한 군내의 부정선거 공작
      에 반대한 장교들은 많았다. 이한림 육사교장은 "사관생도들에게 부정
      을 가르칠 수는 없다"면서 '투표장에 나가서 서 있어만 달라'는 방첩대
      의 부탁도 거절했다고 한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도 생기는 법. 2월28일 대구에서 경북고등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부정선거 반대 시위가 일어났다. 당국이 일요일
      인 이날 민주당 장면 부통령 후보의 유세에 학생들이 참석하지 못하게
      하려고 등교를 시킨 데 반발한 것이다. 투표일인 3월15일에는 자유당의
      노골적인 투표 부정을 규탄하는 시위가 마산에서 터졌다. 시민들이 파
      출소를 습격하여 불태우고 경찰이 발포하여 10여명이 죽었다. 해방 직
      후 좌익들이 주동한 폭동과는 성격이 다른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최초의
      시민 봉기가 일어난 것이다. 마산 시위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중계
      지 역할을 한 곳은 부산의언론과 고등학생들이었다. 1979년에 일어난
      부마사태는 부산 시위가 마산으로 번졌다가 권력의 심장부로 옮겨 박
      정권을 붕괴에 이르게 한 경우이고 1960년엔 마산이 먼저 일어나고 부
      산이 응원하여 서울로 북상한 마부사태였다. 나중에 부산지구계엄분소
      장이되는 박정희나 그의 대구사범 동기생 황용주 부산일보 주필은 학생
      시위를 지원하는 편에 섰다. 황씨의 증언.

      <3월15일 오전 11에 마산의거가 일어났는데 우리가 제1보를 받은 것
      은 석간을 내고 난 후인 오후 3시쯤이었다. 마산 주재 기자가 '북마산
      파출소가 불타고 데모대와 경찰이 대치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냈는데
      경남도경에서 보도관제를 해달라는 전화연락을 해왔다. 저녁 때 경남고,
      부산고가 입학시험 합격자 발표를 했는데 부산일보와 자매관계에 있던
      부산 문화방송 아나운서가 부산일보 편집국에 와서 합격자 명단을 읽고
      있었다. 나는 마산 시위 기사를 적어 아나운서에게 전해주곤 '방금 들
      어온 특급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하면서 읽도록 했다. 중간 중간 그
      런식으로 소식을 전하고 있는데 김지태 사장과 도경국장이 와서 생방송
      을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두 사람을 데리고 바깥
      으로 나가면서 아나운서에게 계속하라고 눈을 껌벅거렸다. 그러고 나서
      일본방송을 틀어보았더니 '한국 부산문화방송의 보도에 따르면…'하고
      마산 시위가 보도되고 있었다. 이튿날에는 문화방송 기자가 마산시위
      현장에 가서 경찰의 발포 총성까지 녹음해가지고 와서 일종의 시위중계
      방송을 하여 시민들을 흥분시켰다. 4월11일 저녁 최루탄이 눈에 박힌
      김주열군의 시체가 마산 바다에서 떠올랐을 때 부산일보 사진부 기자가
      그사진을 특종했다. 그 때는 신문이 매일 조-석간을 내고 있었는데 다
      음날 조간에 시체 사진을 낼 수있느냐 하는 반론도 있었다. 옥신각신
      끝에 '아침이고 지랄이고가 어딨노! 무슨 일이 있더라도 실어야 한다'
      는 주장이 우세하여 이 충격적인 사진이 실렸다. 이 사진은 다른 신문
      에 전재되면서 전국의 민심을 확 돌려놓았다.>.

      부산일보는 김주열 시신 사진이 나간 날 1면에다 김태홍 논설위원이
      쓴 '마산은!'이란 자극적인 시도 실었다.

      '봄비에 눈물이 말없이 어둠 속에 괴면/ 눈동자에 탄환이 박힌 소년
      의 시체가 / 대낮에 표류하는 / 학생과 학생과 시민이 / '전우의 시체
      를 넘고 넘어' / 민주주의와 애 가와 / 목이 말라 온통 설레는 부두인
      것이다' 고교생들을 중심으로 한 학생시위가 전국으로 번져나가는 가운
      데 박정희의 마음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5월8일 송요찬 육군 참모총장
      이 미국방문을 위해 떠날 시점을 거사일로 잡아놓고 사람들을 포섭하고
      있었는데 사태가 급박해져 그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을 것 같았다.
      3월17일 부산으로 내려온 육군전사감 최주종 소장은 박정희를 관사에서
      만나 거사일을 4월 초순으로 앞당기는 문제를 의논했다. 육본의 유원식
      대령은 이승만 대통령이 진해로 휴양을 갈 때 납치하자는 의견을 내기
      도 했다.

      1961년 5·16혁명 직후 박정희가 이낙선에게 구술한 '증언록'에 따
      르면 당시 동원이 가능한 부대는 대강 이러했다.

      <·부산지역: 군수기지사령부 예하 부대, 홍종철 중령의 고사포부대,
      포항 김동하 소장의 해병사단. ·서울지역: 육본 전사감 최주종 소장,
      육본 유원식 대령, 전두열 대령, 김종필 중령외 영관급 약간명. ·대구
      지역: 2군사령관 장도영 중장, 안동사단의 윤태일 준장,이주일 2군참모
      장. ·인천지역: 고사포 대대장 정석윤 중령. ·진해: 육대재학생 공작
      중.>.

      위의 명단엔 장도영 중장과 같은 포섭대상자도 들어 있고 아직 병력
      동원의 세부계획도 마련되지 않았다. 군사혁명의 구상과 포섭 단계이지
      행동계획을 구체화시킬 수준으로 성숙되지는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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