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1998.02.10 19:23
서울 성암여상 한만오(38) 교사는 12일 졸업식을 앞두고 '교복창고'
정리에 바쁘다. 텅빈 창고는 며칠 뒤면 다시 헌 교복으로 가득해진다.
개학하기 무섭게 선배들 옷을 물려입으려고 몰려들 제자들을 떠올리면
벌써부터 흐뭇하다.
한 교사는 벌써 5년째 졸업식때마다 '교복 물려입기' 운동을 벌여왔
다. 경제 찬바람이 드센 올해에는 졸업생들에게 교복 남기기를 더욱 신
신당부했다. "졸업식이 끝난 뒤 학생들은 책상 위에 자기가 입던 교복
을 개어놓고 떠납니다. 그러면 저와 환경동아리 학생들이 다니면서 수
거하지요.".
사진설명 :
한만오 교사가 '교복 창고'에서 학생들에게 묵은 교복을 나눠 주고 있다.
<이종찬기자>
이렇게 모으는 교복은 학급마다 20벌씩, 모두 2백벌이 넘는다. 창고
에 쌓이는 교복은 3월 개학과 더불어 불티나게 주인을 찾아간다. 귀띔
을 받은 신입생부터, 입던 교복이 해진 재학생까지 '교복창고'로 몰려
든다. 한 교사는 "보통 두 달 안에 재고가 바닥난다"며 "올해엔 근검분
위기탓인지 예약하고 싶다는 학생들도 많다"고 했다.
한 교사가 '교복 물려입기'를 시작한 것은 학교 환경동아리 '환경보
전반'을 지도한 지 1년쯤 되던 93년이었다. 우연히 졸업식을 마친 고3
교실에 들렀다가 기막힌 광경을 봤다. "멀쩡한 옷이 찢어지거나 밀가루
범벅이 돼 여기저기 널려있는 겁니다. 동아리 학생들과 그나마 성한 옷
들을 가려 모았다가 나중에 재학생들에게 나눠줬지요.".
그런 그를 주변에선 그리 곱게 보지 않았다. "학생들이 자주 저를 찾
아오면서 교무실이 번잡해졌어요. 웬 궁상이냐는 핀잔도 많이 들었습니
다." 일부 학생들의 비뚤어진 반응은 더욱 그를 괴롭혔다. "아무 말도
없이 옷을 훔쳐가는 학생이 있을 땐 실망이 컸습니다. 심지어 집에서
교복살 돈을 받아 딴 짓하고 헌 옷 얻으러 오는 학생도 있었지요.".
어렵게 시작한 일이지만, 이제는 학교와 전교생이 참여하는 연례행
사로 자리잡았다. 졸업식을 끝내고 옷을 찢거나 밀가루를 뿌리는 학생
들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1학년 김정희(17)양은 "작년 입학할 때이
모임을 알았다면 12만원 넘는 교복을 맞추지 않았을 것"이라며 "모두들
헌옷을'학교 옷'이라는 생각으로 더 아껴 입는다"고 말했다.
학교측은 올해 신관 4층에 교복 전시관도 만들기로 했다. 한 교사는
개학때 나눠주고 남는 교복은 다시 손을 봐서 5월쯤 학교바자회에 내놓
을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 이종혁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