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1997.12.19 19:00
60. 김영삼 .
## 60. 김영삼 ##.
북한의 노동신문은 10월28일에 1면 머리기사로 박정희의 죽음을 보
도했다. 그 제목은 '박정희 역도가 총탄에 맞아 죽었다'였다.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의 총탄에 맞아 서거했을 때보다는 그래도 표
현이 좀 나은 편이었다.
사진설명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된 지 26일만인 1979년 10월29일 청와대의 고(故)박정희대통령 빈소 앞에서
조문하는 김영삼 신민당 총재. 김총재는 조문에 반대하는 일부 재야인사들을
만류하고 문상했다.
8·15저격사건 때 노동신문은 '총탄세례를 받은
박정희는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가 방탄장치를 한 연탁밑
으로 기어들어가 간신히 목숨을 건지는 추태를 부리고 그 옆에 앉아 있던
박정희의 여편네는 머리에 총탄을 얻어맞고…'라고 보도했다.
1994년7월 '민족의 원수' 김일성이 죽었을 때 조문을 해야 한다고 주
장하고 나섰던 사람들 중에는 '민족 중흥의 기수'가 쓰러졌을 때는 '잘됐
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다.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새벽 4시를 넘어서 미국의 한 교포로부터 걸려
온 전화를 받고 박정희대통령의 서거를 알게 되었다. 그 교포는 "지금 미
국 텔레비전 방송에서 박 대통령이 죽었다는 뉴스가 방영되고 있다"고 전
했다. 김영삼 총재는 1987년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사건은 솔직히 충격적이었습니다. 불행한 일이지만 올 때가 왔다
고 생각했지요. 그 다음날 아침에 윤모 목사가 찾아왔더군요. '박정희 역
적은 죽었지만 용서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죽은 사람
에게 그러면 안된다고 얘기했지요. 나는 죽은 박정희를 용서하고 싶다고
하면서 문상을 가고 싶다고 하니까 자기는 못가겠다고 합디다. 다른 사람
들도 나에게 문상을 가지 말라고 말렸어요. 그렇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
으로서는 원수도 용서하라고 했는데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했죠.".
--인간 박정희에 대해서 측은하게 생각하셨나요.
"결국 자기가 선택한 길이다, 처절한 길을 선택했다고 생각했죠.".
--흔히 박 대통령의 정치는 나쁘게 평가하는 사람들도 경제 정책은 높
게 평가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때 시대상황이 경제적으로 좋아질 수 있는 여건에 있었습니다. 만
일에 박 대통령이 아니고 민주주의 정권이었으면 경제적으로 굉장히 커질
수 있었습니다. 박정희씨 때문에 경제가 발달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요.경
제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가지고 경제가 6년 후퇴했
다고 하더군요.".
김영삼 총재는 청와대를 방문하여 빈소에 조의를 표했다. 연금상태에
있었던 김대중은 11월1일 대통령 빈소에 조문하고 싶다는 뜻을 기관에 전
달했던 것 같다. 정보부와 경찰은 이 뜻을 합수부에 보고했다. 전두환 합
수본부장은 "정치적시위를 노리는 행동으로 판단되니 거절함이 좋겠다"고
했다.
1979년 11월2일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는 미 국무부에 올린
한국정세보고 전문에서 야당-재야가 한국의 내정에대한 미국의 개입을 촉
구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야당과 재야세력의 지도자들은 미국정부의 확고한 개입만이 한국 군
부의 집권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있다. 그들은 미국의 영향력
이 수년내 최고조에 달한 상태이므로 이 힘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
은 짓이라고 거듭해서 말하고 있다. 야당 정치인들은 한국의 장래는 한국
인들이 결정해야 한다는 우리의 성명을 비웃고 있다. 유정회의 한 의원은
"당신들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이런 유동적인 상황에서 미국은 군부,여-야
정치인,국민과 함께 4대 키 플레이어가 되어있다"고 말했다. 아주 기묘하
게도 김영삼은 자신의 지지자들로부터도 정부가 민주발전으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진짜 걸림돌이 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 온건한 신민당의원은
말하기를 "김영삼은 비타협적인 태도와 선동적인 발언으로 군부를 자극하
여 그들이 정권을 잡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도록 만들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야당-재야에서는 미국이 민주화를 도와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우리
내정에 개입해 달라고 미국의 손을 끄는 사이 정부-여권 세력에서는 계엄
사와 합수본부에 기대어 기득권을 유지해 보려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예
로부터 주체성과 자주성이 약하여 사대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온 한국의 문
민 정치인들은 박대통령의 사망으로 권력공백기가 생기자 또다시 힘센 편
을 기웃거리기 시작한다.
27일 날이 밝자 계엄사 합수본부로 바뀐 보안사는 신속하게 권력의 공
백을 메우고 들어갔다. 합수본부가 혼돈기에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
은 보안사가 가진 군사력 때문이 아니라 전두환 사령관이 이날 밤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여 권력공백기의 그 여백을 먼저 채우고 들어갔기 때문이었
다. 보안사는 권력은 큰 부서였지만 병력은 자체경비도 할수 없는 수준이
었다. 전두환 사령관이 밤10시30분쯤 보안사에 들러 대통령의 시신이 바
로 옆인 국군서울지구병원에 안치되어 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참모들은
쿠데타 기도라고 판단하였다. 보안사가 쿠데타에 가담한 군부대로부터 안
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한 참모들은 전 사령관에게 "안전한 육군본부로 지
휘부를 옮기자"고 건의했던 것이다. 전 사령관은 우국일 참모장과 이상연
감찰실장 정도만 남기고 다른 참모들과함께 육군본부 보안부대로 갔다.일
종의 피난이었다. 전사령관은 수경사에 부탁하여 경비병력을 보내 보안사
를 지켜달라고 했다.
27일 새벽 2시를 넘어 이상연 감찰실장이 지휘하여 김병수 원장을 연
금하고 있던 정보부 경비원 유성옥과 서영준을 체포할 때는 수갑을 찾을
수가 없어서 커튼줄을 뜯어내 묶어야 했다. 동원할 수 있는 물리력에서는
이렇게 초라한 보안사였지만 27일 오전에는 계엄령의 엄호 아래에서 가장
강력한 권부이던 중앙정보부를 간단히 접수했다.
접수책임자 이상연 대령은 정보부의 국내기능이 들어있었던 남산분청
을 접수하러 가기 전에 미리 남산으로 전화를 걸어 안내자를 내보내라고
지시했다. 처음에는 정보부의 정문을 열어줄지가 불안했던 것이다. 정보
부 간부들은 이상연 대령의 지시에 고분고분 협조했다. 부장이 대통령 시
해범으로 구속수사를 받고있고 국장급 간부 수십명이 일단 공모혐의로 합
수부에 연행된 뒤였기 때문에 그들은 이미 기가 죽어 있었다. 연행된 국
장급 간부들 중에서는 현홍주 기정국장 등 수명만 구제되고 나머지는 모
두 면직된다.
권력은 본질적으로 폭력이다. 굳이 표현한다면 합법적인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의 살해에 성공한 뒤 쿠데타를 꿈꾸었던 김재규는 보
안사 서빙고 수사분실에서 신동기 수사관으로부터 난타를 당하는 순간부
터 공식적으로 파멸을 맞았던 것이다. 김재규는 항소이유보충서에서 이렇
게 썼다.
[27일 새벽에 서빙고로 연행되자마자 수사관들은 본인의 전신을 닥치
는대로 구타하고 심지어 EE8전화선을 손가락에 감고 전기고문까지 자행하
였습니다. 이런 고문이 며칠간이나 계속되었는지 모릅니다. 여러 차례 졸
도도 하여 심지어 어떤 수사관에게 이대로 죽으면 이 꼴로 고향에 가게
하지 말고 서울에 묻어달라고 유언까지 한 일이 있었습니다. 본래 간이
나쁜 본인은 지혈이 안되어 온몸이 피하출혈로 시뻘겋게 되었고 그 흔적
이 지금까지 남아있습니다. 산송장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북한의 노동신문은 10월28일에 1면 머리기사로 박정희의 죽음을 보
도했다. 그 제목은 '박정희 역도가 총탄에 맞아 죽었다'였다.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의 총탄에 맞아 서거했을 때보다는 그래도 표
현이 좀 나은 편이었다.
사진설명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된 지 26일만인 1979년 10월29일 청와대의 고(故)박정희대통령 빈소 앞에서
조문하는 김영삼 신민당 총재. 김총재는 조문에 반대하는 일부 재야인사들을
만류하고 문상했다.
8·15저격사건 때 노동신문은 '총탄세례를 받은
박정희는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가 방탄장치를 한 연탁밑
으로 기어들어가 간신히 목숨을 건지는 추태를 부리고 그 옆에 앉아 있던
박정희의 여편네는 머리에 총탄을 얻어맞고…'라고 보도했다.
1994년7월 '민족의 원수' 김일성이 죽었을 때 조문을 해야 한다고 주
장하고 나섰던 사람들 중에는 '민족 중흥의 기수'가 쓰러졌을 때는 '잘됐
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다.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새벽 4시를 넘어서 미국의 한 교포로부터 걸려
온 전화를 받고 박정희대통령의 서거를 알게 되었다. 그 교포는 "지금 미
국 텔레비전 방송에서 박 대통령이 죽었다는 뉴스가 방영되고 있다"고 전
했다. 김영삼 총재는 1987년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사건은 솔직히 충격적이었습니다. 불행한 일이지만 올 때가 왔다
고 생각했지요. 그 다음날 아침에 윤모 목사가 찾아왔더군요. '박정희 역
적은 죽었지만 용서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죽은 사람
에게 그러면 안된다고 얘기했지요. 나는 죽은 박정희를 용서하고 싶다고
하면서 문상을 가고 싶다고 하니까 자기는 못가겠다고 합디다. 다른 사람
들도 나에게 문상을 가지 말라고 말렸어요. 그렇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
으로서는 원수도 용서하라고 했는데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했죠.".
--인간 박정희에 대해서 측은하게 생각하셨나요.
"결국 자기가 선택한 길이다, 처절한 길을 선택했다고 생각했죠.".
--흔히 박 대통령의 정치는 나쁘게 평가하는 사람들도 경제 정책은 높
게 평가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때 시대상황이 경제적으로 좋아질 수 있는 여건에 있었습니다. 만
일에 박 대통령이 아니고 민주주의 정권이었으면 경제적으로 굉장히 커질
수 있었습니다. 박정희씨 때문에 경제가 발달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요.경
제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가지고 경제가 6년 후퇴했
다고 하더군요.".
김영삼 총재는 청와대를 방문하여 빈소에 조의를 표했다. 연금상태에
있었던 김대중은 11월1일 대통령 빈소에 조문하고 싶다는 뜻을 기관에 전
달했던 것 같다. 정보부와 경찰은 이 뜻을 합수부에 보고했다. 전두환 합
수본부장은 "정치적시위를 노리는 행동으로 판단되니 거절함이 좋겠다"고
했다.
1979년 11월2일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는 미 국무부에 올린
한국정세보고 전문에서 야당-재야가 한국의 내정에대한 미국의 개입을 촉
구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야당과 재야세력의 지도자들은 미국정부의 확고한 개입만이 한국 군
부의 집권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있다. 그들은 미국의 영향력
이 수년내 최고조에 달한 상태이므로 이 힘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
은 짓이라고 거듭해서 말하고 있다. 야당 정치인들은 한국의 장래는 한국
인들이 결정해야 한다는 우리의 성명을 비웃고 있다. 유정회의 한 의원은
"당신들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이런 유동적인 상황에서 미국은 군부,여-야
정치인,국민과 함께 4대 키 플레이어가 되어있다"고 말했다. 아주 기묘하
게도 김영삼은 자신의 지지자들로부터도 정부가 민주발전으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진짜 걸림돌이 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 온건한 신민당의원은
말하기를 "김영삼은 비타협적인 태도와 선동적인 발언으로 군부를 자극하
여 그들이 정권을 잡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도록 만들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야당-재야에서는 미국이 민주화를 도와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우리
내정에 개입해 달라고 미국의 손을 끄는 사이 정부-여권 세력에서는 계엄
사와 합수본부에 기대어 기득권을 유지해 보려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예
로부터 주체성과 자주성이 약하여 사대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온 한국의 문
민 정치인들은 박대통령의 사망으로 권력공백기가 생기자 또다시 힘센 편
을 기웃거리기 시작한다.
27일 날이 밝자 계엄사 합수본부로 바뀐 보안사는 신속하게 권력의 공
백을 메우고 들어갔다. 합수본부가 혼돈기에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
은 보안사가 가진 군사력 때문이 아니라 전두환 사령관이 이날 밤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여 권력공백기의 그 여백을 먼저 채우고 들어갔기 때문이었
다. 보안사는 권력은 큰 부서였지만 병력은 자체경비도 할수 없는 수준이
었다. 전두환 사령관이 밤10시30분쯤 보안사에 들러 대통령의 시신이 바
로 옆인 국군서울지구병원에 안치되어 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참모들은
쿠데타 기도라고 판단하였다. 보안사가 쿠데타에 가담한 군부대로부터 안
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한 참모들은 전 사령관에게 "안전한 육군본부로 지
휘부를 옮기자"고 건의했던 것이다. 전 사령관은 우국일 참모장과 이상연
감찰실장 정도만 남기고 다른 참모들과함께 육군본부 보안부대로 갔다.일
종의 피난이었다. 전사령관은 수경사에 부탁하여 경비병력을 보내 보안사
를 지켜달라고 했다.
27일 새벽 2시를 넘어 이상연 감찰실장이 지휘하여 김병수 원장을 연
금하고 있던 정보부 경비원 유성옥과 서영준을 체포할 때는 수갑을 찾을
수가 없어서 커튼줄을 뜯어내 묶어야 했다. 동원할 수 있는 물리력에서는
이렇게 초라한 보안사였지만 27일 오전에는 계엄령의 엄호 아래에서 가장
강력한 권부이던 중앙정보부를 간단히 접수했다.
접수책임자 이상연 대령은 정보부의 국내기능이 들어있었던 남산분청
을 접수하러 가기 전에 미리 남산으로 전화를 걸어 안내자를 내보내라고
지시했다. 처음에는 정보부의 정문을 열어줄지가 불안했던 것이다. 정보
부 간부들은 이상연 대령의 지시에 고분고분 협조했다. 부장이 대통령 시
해범으로 구속수사를 받고있고 국장급 간부 수십명이 일단 공모혐의로 합
수부에 연행된 뒤였기 때문에 그들은 이미 기가 죽어 있었다. 연행된 국
장급 간부들 중에서는 현홍주 기정국장 등 수명만 구제되고 나머지는 모
두 면직된다.
권력은 본질적으로 폭력이다. 굳이 표현한다면 합법적인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의 살해에 성공한 뒤 쿠데타를 꿈꾸었던 김재규는 보
안사 서빙고 수사분실에서 신동기 수사관으로부터 난타를 당하는 순간부
터 공식적으로 파멸을 맞았던 것이다. 김재규는 항소이유보충서에서 이렇
게 썼다.
[27일 새벽에 서빙고로 연행되자마자 수사관들은 본인의 전신을 닥치
는대로 구타하고 심지어 EE8전화선을 손가락에 감고 전기고문까지 자행하
였습니다. 이런 고문이 며칠간이나 계속되었는지 모릅니다. 여러 차례 졸
도도 하여 심지어 어떤 수사관에게 이대로 죽으면 이 꼴로 고향에 가게
하지 말고 서울에 묻어달라고 유언까지 한 일이 있었습니다. 본래 간이
나쁜 본인은 지혈이 안되어 온몸이 피하출혈로 시뻘겋게 되었고 그 흔적
이 지금까지 남아있습니다. 산송장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