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1997.08.06 13:20
## '용의 눈물'로 절정 오른 `사극의 왕' ##.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생각으로 죽기 아니면 살기로 덤벼들 뿐

현실 정치와 숱한 대비를 이루며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는 TV
드라마 '용의 눈물'. 이 드라마의 연출자 김재형(62) PD가 밝히는 연
출력의 비결이다. 그의 스케줄을 보면 누구든 '그가 정말 죽기 살기로
덤벼들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매주 월화 스튜디오 녹화, 수-
목-금 야외 녹화, 토요일 편집, 일요일 보충 녹화와 콘티 작성…. 그
는 지난해 10월 방영을 시작한 이래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이 스케줄대
로 강행군을 해왔다. 대부분의 우리나라 영화 감독들이 1년에 한편씩
찍는 것과 비교해 보면 격무가 아니라 인간 한계에 도전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아닌 게 아니라 여름 들어 '용의 눈물' 제작진도 지친 기색을 보이
기 시작했다. 배우도 말도 스태프도 마찬가지이다. 지난 7월23일 민속
촌에서 촬영할 때는 장정 둘이 탈진해서 쓰러지기도 했다. 그래도 어
느 누구도 힘들다는 말은 감히 꺼내지 못한다. 예순이 넘은 노연출자
가 이리뛰고 저리뛰며 '큐!' 사인을 외치느라 땀을 뻘뻘 흘리는 마당
에 아들이나 조카뻘밖에 안되는 그들로서는 몸을 사릴 수가 없다. 촬
영 현장에서 그는 우렁찬 목청만큼이나 카리스마가 있었고 누구든 따
를 수밖에 없는 리더십을 발휘한다. 별명까지 '리더십'이다. 그는 배
우와 스태프들이 힘에 겨워하자 "사극은 사우나하는 기분으로 해야 제
맛이야"하고 독려겸 농담을 던졌다. 체중이 꽤 나가는 그는 체질적으
로 땀을 많이 흘리는 등 여름을 몹시 타지만 "더위는 다이어트에 좋아
대환영"이라고 할 만큼 일에 미쳐 있었다.
이런 그에게 가정은 뒷전일 수밖에 없다. 2남2녀의 아버지지만 자
식들 입학식과 졸업식에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빵점 아빠'이다.
아들에게 "너, 올해 몇이냐. 네가 벌써 그렇게 됐냐"고 물어 볼 정도
라고 한다.
"저는 이 세상에서 장가를 가장 잘 든 사람이고, 아내는 이 세상에
서 시집을 가장 잘 못 온 사람입니다." "이대 정외과 출신인 아내와는
초등학교 동창입니다. 남편 볼 시간이 없어서 화초를 기르는 사람입니
다. 올해로 결혼 36년째이지만 부부가 아이들을 데리고 어딜 간 적이
없어요. 70년대 중반 1박2일로 부산에 갔다 온 것이 전부입니다." 그
래서 자녀들은 "아버지는 말 마차야, 우리는 아버지가 날라 주는 돈도
필요하지만 아버지의 사랑도 필요하다"고 불만을 터트린다고 한다.
그래도 그는 한 드라마가 끝나면 곧장 역사 소설 몇권을 싸들고 한
적한 산에 들어가 틀어밖힌다. 다음 작품 구상을 위해서이다. 그의 유
일한 취미가 역사 소설 읽기이다. 집에서도 역사소설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현실의 드라마는 사랑 타령으로 끝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역사속에는 사랑도있고 진실도 있고 감동도 있어요. 없는 게 없죠. 그
래서 영원히 사극만 할 것 같습니다." 외모는 두주불사형이지만 술을
한 방울도 못 마신다. 때문에 더 일에 몰두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35년 충북 음성에서 2남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안동 김씨
인 그의 조상들은 대부분 관직생활을 했다. 할아버지는 구한말 평안도
창성군수를 지냈고 보성전문에서 법학을 전공한 아버지 김학묵(83)옹
은 보사부 차관까지 지냈다. 하지만 김 PD 대에서 그 전통은 끝났다.
그의 영향 때문인지 하나뿐인 남동생도 KBS PD로 있고 두 아들도 영상
관계일을 하고 있다.
김 PD는 휘문고에 입학했다. 그가 2학년 때 9·28 수복을 맞자 아
버지는 "경제를 공부해 폐허가 된 나라 재건에 나서라"며 경기상업학
교로 전학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그는 연극을 택했다. 당시 그는
축구부에 적을 두고 있었는데 어느날 연극부와 합숙 훈련을 하면서 인
생이 바뀌게 된 것이다.
연극부 학생 중 한 명이 수영하다가 죽는 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연극반을 지휘했던 KBS 성우 박영민씨가 공을 차고 있던 김 PD를 보더
니 "야, 니마스크 연극에 맞는데 연극 한번 해보지 않을래"하고 권유
했다. 난생 처음 무대에 선 그는 역사극 '양만춘 장군'에서 문지기 B
역을 맡았다. 연극이 어쩐지 정서에 맞는다고 생각한 그는 연극반 멤
버들과 어울리게 됐고, 끝내 축구부를 나와 연극부에 들어갔다. 연극
부에 합세한지 얼마 안돼 그는 유치진 원작의 '원술랑'에 주연으로 발
탁돼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는 주연으로 급성장했다. 그해 겨울 한국
연극학회가 주최한 예술제가 열렸고, 그는 유치진 원작의 '사육신'에
서 수양대군역을 맡아 최우수 남자 주연상을 받았다. 첫 출연작도, 첫
수상작도 사극이었던 것이다.
그가 처음 시작한 직업은 성우였다. 고3때 그는 기독교 방송 개국
성우 모집 시험에 합격했다. 집안에서 난리가 났다. "이제 본격적으로
딴따라의 길을 걷는단 말이냐. 한집에 있을 수 없다"며 절연을 선언한
것이다. 그는 부모에 대한 반항심에서 경제학과가 아닌 연대 정외과에
지원했으나 떨어졌다.
실의에 빠진 그에게 연극 선배 조항씨가 "동국대는 연극부가 강하
고 국문과에도 희곡 강좌가 있으니 지원해 보라"고 권유했다. 그는 성
우와 학생 신분을 병행했다. 대학교 3학년 때는 연극부장을 맡으면서
교내학술부장도 맡았다. 3학년 때 '명암 지대'라는 단막극을 시작으로
연출을 시작했다. 이연극은 전국을 순회했을 정도로 대성공이었고, 그
에게는 "내게도 이런 끼가 있었구나"라는 사실을 확인케 해 준 '사건'
이었다. 그는 대학교 2학년 때 KBS 서울 중앙방송국 성우 2기생 모집
시험에 합격, CBS와 KBS 성우를 동시에 했다.
● 두 달만에 올린 정상 시청률 끝까지 유지.
4학년 2학기로 접어들면서 인생의 전환점이 다시 왔다. 그에게 주
연을 맡기던 연극 연출가 김주대씨가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갑자기 성
우 생활이 싫어졌다. 방황하는 그에게 방송사 선배들은 라디오 프로그
램 연출자를 권했다. 그는 국내 첫 라디오 PD 공채 시험에 합격해 라
디오 PD 생활을 시작했지만 몇달만에 그만두었다. 62년 TV방송이 시작
됐기 때문이다. 주위에서는 안방에서 영화를 보는 시대가 왔다고 난리
였다.그는 수업과 연극 연출 시간을 빼놓고는 대부분을 극장에서 보내
는 영화광인지라 "적성에 맞고 장래성 있는 직업일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스쳤다. 곧바로 미국에 있는 작은 고모에게 TV에 관한 이론 서
적을 보내달라는 장문의 편지를 썼다. 태평양을 건너온 것은 마샬 맥
루한의 책이었다. 그는 그 책에서 "TV는 잘 이용하면 원자력의 힘을
갖지만 잘못 이용하면 원자폭탄의 힘으로 인류를 망칠 수 있다"는 말
에 감명받아 TV에 인생을 걸기로 했다. "라디오·무대극 연출도 했겠
다, 대학시절에 박상호 감독 밑에서 조감독 생활도 했으니 연출이라면
자신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방송국 간부의 추천으로 방송국 PD가 됐다. KBS 개국 준비위
원으로 출발한 김 PD의 첫작품은 '영이의 일기'라는 어린이 연속극이
었다. 인형,나무 등과 대화를 통해 세상을 풍자하는 내용이었다. 반응
이 좋자 방송국에서는 그에게 사극을 하자고 제의했다. 그는 수양대군
양만춘장군 원술랑 등 주로 사극 배우로 뛰어 본 경력도 있으니까 사
극 연출도 잘할 것이라고 판단한것 같았다. 첫 작품은 박만신씨 원작
의 '국토만리'였다. 그는 64년초 TBC가 개국하면서 개국 준비 위원으
로 스카우트됐다. TBC 개국작품도 사극 '민며느리'였다. 이후 그에게
는 사극 연출가라는 딱지가 붙는다. 최초의 일일 연속사극인 '사모곡'
연출자도 그였고, 한국 최초의 미스터리 터치 일일 연속극인 '연화'도
그의 작품이다. 30대와 40대 시청자들에게는 기억에 생생한 '인목대비'
'별당 아씨' '임금님의 첫사랑' '옥피리' 등도 작품이다.
사극의 왕 대접을 받는 그였지만 한때는 사극이 싫어 변신을 시도
한 적이있다. 사극만 계속하다 보니 30대임에도 옛날옛적 사람으로 돌
아간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시도한 현대물은 '오늘은 왕',
'서울이여 안녕', '달동네' 등이었고 이 작품들은 예외 없이 히트했다.
그가 연출한 드라마는 낮은 시청률로 시작해 두 달 안에 정상에 오른
뒤 종영까지 그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한명회'도
그랬고 '용의 눈물' 그랬다.
● 늘 마지막이란 각오 "죽을 때까지 드라마만".
그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는 일본의 구로자와 아키라이다. "구로자
와는 장면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영상의 물감역을 하는 조명
을 그보다 더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사람은 아직 못봤습니다. 그
구로자와 는 일본의 언론이 만들었습니다. 언론은 그의 스캔들까지도
용서했습니다." 그도 구로자와처럼 현장을 머리 속에 완전히 넣고 콘
티를 짜는 것으로 유명하다.
집보다 더 친숙한 민속촌을 구석구석까지 꿰고 있으니까 콘티를 만
들기 위해 현장 사진을 찍을 필요가 없다. 물론 그만큼 제작 시간이
단축된다.
그는 항상 '이 작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연출에 임한다고 한
다. "매번 내 마지막 작품을 찍는다고 생각하면 비장감이 감돌게 되고
훨씬 더 진지해지고 집중할 수 있게 되죠.".
그가 지금껏 가져본 유일한 재충전 시간은 '용의 눈물'을 연출하기
직전 공륜 수입 비디오 심의의원을 2년간 지낸 것이다. 그 동안 외국
비디오 1천편 이상을 '자르기' 전 원화로 본 것이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그는 왕들 얘기보다는 일반 백성, 선비, 유학자 이야기를 주로
그리면서 그 왕조에서 가장 빛났던 사람 중심 이야기로 드라마를 끌고
가는 것이 남은 숙제라고 말한다.
"연출자가 프로그램에 사인을 집어 넣는 것은 역사 앞에 책임을 진
다는 뜻입니다. 엄숙해질 수밖에 없어요.".
PD들이 충무로 영화가로 입성하는 것이 유행처럼 돼버린 요즈음이
지만 그는 앞으로도 방송극에만 매달리겠다고 했다. "82년 '춘희'라는
영화를 연출하면서 베드신을 많이 넣자고 주장하는 제작자와 갈등을
겪어 영화를 망친 이후 다시는 영화를 하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드라마를 통해 역사를 다루는 한 그는 정치에 민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뜻밖에도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다고 했다. 작은아버지 김
준욱씨가 국회의원을 지냈기 때문에 정치의 속성을 누구보다도 잘 안
다고 했다. 그는 현실 정치보다는 권력의 속성, 권력을 놓고 벌이는
인간드라마에 더 흥미를 느낀다고 한다.
김 PD는 이 작업을 2001년까지 계속해야 한다. KBS는 조선 왕조 실
록 전체를 드라마화할 계획이고 어차피 왕들의 이야기니까 지금의 '용
의 눈물'이라는 타이틀을 유지할 것이라는 것이다. 2001년이면 그는
67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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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형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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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충북 음성 출생, 경기상고·동국대 국문과 졸업,
62년 KBS 개국위원으로 KBS 입사. 사극 '국토만리' '민며느리' '사
모곡' '임금님의 첫사랑' '별당아씨' '인목대비' '상노' '천명' '비바
람 찬이슬' '여보, 정선달' '한명회', 현대극 '서울이여 안녕' '엄마
의 일기' '형사수첩' '화조' '세 자매' '물망초' '달동네' '임이여 임
일레라' 등 연출.
<신진상 주간부기자>